요즘은 사과가 귀하신 몸이 됐다. 마트의 조명발 아래 진열되거나 투명한 뚜껑의 종이박스에 예닐곱 개씩 포장되어 값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30년 전 내가 첫아이를 가졌을 때만 해도 지금 사과 한 개 값 정도인 천 원짜리 한두 장이면 비닐봉지에 한가득 사과를 담아주던 길거리 장수가 흔했다. 크고 달기만한 요새 사과와는 달리 작지만 새콤하고도 향긋한 국광이며 홍옥 사과가 리어카에 잔뜩 쌓여있었다.
이제는 구경하기도 어려운 그 사과들이 어찌나 입에 당기던지 출퇴근 때마다 버스 정류장에서 만나는 사과 리어카를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출근 때는 버스를 기다리며 눈으로 사과를 즐겼고, 퇴근하면서는 하루건너 한보따리씩 사곤 했다. 그러면서 한 가지 깨달은 점은 리어카 장사가 그냥 손님만 기다려서 되는 건 아니란 사실이었다. 사과 장수는 잠시도 가만있지 않고 사과를 광내서 빨갛게 익은 쪽이 잘 보이도록 돌려놓았다. 사과를 막 팔고 났을 때는 더욱 손놀림이 바빴다.
값 싼 사과 하나도 그렇듯 잘 보이게 해야 장사가 되는 거였다. 하물며 값 비싼 상품은 오죽할까. 사과를 돌려놓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고도의 심리의 광고로 좋은 점만 부각시킬테니 말이다. 반면 소비자 입장에서는 행여 겉으로 보고 듣는 것에만 넘어가지 않도록 지갑 단속을 단단히 해야 할 것 같다. 최근 한 금융사가 개최한 소위 글로벌 자산관리 세미나에 참석하면서 문득 오래전 그 사과 장수가 떠올랐다. 세미나 제목은 거창했지만 결국 해외 금융상품 설명회였고, 리어카의 사과 돌려놓기와 다르지 않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반짝이는 빨간 사과
하기는 사람의 능력을 포함한 모든 판매가 그럴 터이다. 사과야 아무리 빨간 데만 보이게 해놨어도 직접 내 손으로 집어 다시 돌려보고 살 수 있다. 하지만 금융상품은, 더구나 한국도 아닌 다른 나라의 주식이며 채권과 펀드는 나 같은 사람에겐 장님 코끼리 더듬기에 다름 아닌 듯 했다. 그 지역 투자 전문가로서 열변을 토하는 강사와는 달리 대부분 머리 희끗한 참석자들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그럼에도 나부터가 이런 세미나에 시간을 낸 이유는 기준금리 1%시대가 된 지금, 더 이상 정기예금 식으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일 게다.
내 옆에도 70대는 훌쩍 넘어 뵈는 노신사가 앉았지만 노후자금에 대한 재테크 고민을 덜어보려고 참석한 노년층이 눈에 많이 띄었다. 보험사나 투자증권사들로서는 어찌 보면 저금리의 호기에 젊은층 보다는 돈이 많은 이들을 붙잡고자 전력투구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러니 상품의 매력을 극대화한 강의에 고급 식사에다 선물까지 제공한 게 아니겠는가. 나는 아마 별 영양가가 없는 참석자일지도 몰랐다. 소액이지만 이 회사가 강권해 덜컥 투자한 펀드에서 5년째 손실을 보면서 제기한 불만을 달래고자 초청장을 보냈지 싶어서다.
“신문에도 나왔다시피 은행 예금으로 원금을 두 배 늘리려면 40년이 걸리는 시대가 됐다. 일본에서는 제로 금리의 은행과 우체국 예금, 국채에 투자한 원금은 20년간 불어나지 않았다. 우리도 그 전철을 밟을지 모른다.” 금융사 대표는 인사말을 끝내며 참석자들의 재테크 고민에 시동을 걸었다. 그러나 여기 길이 있다는 듯 전문가들은 정체된 한국시장에서 눈을 돌려 상승세를 타고 있다는 해외시장에 투자할 것을 권했다. 이어 중국의 주식에서부터 브라질과 인도의 채권, 영국에서 들여왔다는 월지급식 펀드가 줄줄이 소개됐다.
모두가 정말 반짝이는 빨간색의 사과였다. 사과 장수가 그랬듯 최대한 좋은 쪽으로 돌려놓은 까닭이었다. 그러나 해외상품에 투자할 때 환율을 비롯해 발생 가능한 여러 불안 변수들, 노후 생활자금 충당을 위한 거라는 장기 월지급식 펀드가 수익을 내지 못할 때 원금이 날아갈 수도 있는 위험, 수익에 따른 세금과 건강보험료 부담 등은 빨갛지 않은 쪽이다. 그럼에도 다뤄지면 좋으련만,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슬쩍 넘겨지거나 자료의 맨 밑에서 아주 작은 글자들로 눈을 피하고 있는 부분이다.
알아야 면장을 하지
거의 은행만 맴돈 나로서는 아무리 빨개 보여도 과연 맛있는 것일지 몰라 선뜻 투자할 엄두를 내기는 어렵다. 많지 않은 자금에서 사과 구입 때와는 전혀 다른 규모를 들이밀어야 하면서도 사과처럼 직접 살펴 담을 수 없으니 더 그렇다. 하기야 낱개로 고른다면 모를까 상자로 구입하는 사과는 또 다를 수 있겠다. 지금은 사라졌겠지만 과거 한때 미국에선 ‘코리안 애플’이란 말이 돌았다지 않는가. 한인 가게에서 구입한 사과상자를 열어보면 윗줄과 아랫줄의 사과 품질이 다르다는 데서 생긴 뼈아픈 말로 기억된다.
무엇보다 문제는 보기만 해도 맛있는지 여부를 가늠할 수 있는 사과와는 달리 금융상품은 아는 만큼만 보인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제는 확정금리만 보고 예금하면 그만인 시대는 사라져가고 금융상품은 전 세계를 넘나들며 점점 복잡 다양해지는 판이니 당최 파악이 어렵다. 나만 그런 건 아닌가 보다. 한 카드사가 지난해 실시한 금융이해도 조사에서 한국은 아시아·태평양 16개국 중 13위에 불과했다지 않은가. 그나마도 나이 들어가며 더 떨어지는 것 같으니 어쩌나. 수입이 없을수록 돈 관리는 더욱 중요해져 가는데.
그래서 우리가 있다는 듯 금융사 직원들은 상품을 권하기 바쁘다. 이미 투자된 것을 꼼꼼히 관리해주기보다는 새것에 투자하라고 부추기기 일쑤다. 그 말만 믿고 잘 알지도 못한 채 투자한 결과 수익이 나면 다행이지만 손실은 완전 고객의 차지다. 투자 계약 때는 당연하고, 이후 손실이 나더라도 수수료를 꼬박꼬박 챙겨가는 금융사로선 걱정할 게 없다. 빨갛지 않은 쪽도 면밀히 살펴 모르는 건 물어봐서 잘 이해하고 투자하지 않으면 금융사만 좋은 일 시키기 십상이다. 어디 내 펀드 경우만의 아픈 경험일까.
특히 노년에 건강 다음으로 가장 중요하게 꼽히는 돈, 욕심을 내서도 안 되겠지만 손에 쥔 모래마냥 술술 빠져나가게 해서도 안 된다는 건 분명하다. 그러려면 건강을 위해 노력하듯 금융지식과 그 활용도를 높이기 위해서도 관심을 갖고 공부해야만 할 것 같다. 전 세계적으로 불확실한 경제상황에서 선택사항은 많아져만 가는데, 알아야 면장을 할 게 아니겠는가. 최고 전문가가 자산관리를 맡아준다 할지라도 ‘정말 맛있는 사과’에 대한 최종책임은 사과를 먹는 사람에게 돌아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