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04.22 09:46

[시니어 에세이] 망우리의 봄

봄꽃들이 한창 물이 오른 산책길에 형형색색의 옷을 입은 산책객들이 분주하게 오고간다. 자연 그대로의 산길과 숲길이 잘 조성된 이곳은 이름만 들어도 섬뜩한 망우리 공동묘지다.

한식을 하루 앞둔 휴일, 무덤을 찾아온 가족보다 산책하는 사람들이 더 많지만 그래도 무덤 앞에서 음식을 나누는 가족의 모습이 여유롭게 보인다.

망우산 일대에 조성된 망우리 공동묘지는 1933년부터 1973년 까지 40여 년 동안 많은 서울 사람들을 품었다. 당시 4만여기에 이르던 분묘는 지금은 8000여기가 채 안되고 이장한 빈터에 나무들이 들어서면서 숲이 조성되고 길이 다듬어져 차츰 공원으로 바뀌고 명칭도 망우리 공원으로 바뀌었다.

망우리 공원엔 한국의 근현대사를 풍미한 애국지사는 물론이고 정치가, 과학자, 문필가, 예술가등 50여 선인들과 비록 이름은 알려지지 않더라도 나름대로 열심히 살다간 수많은 민초들이 함께 묻혀있는 곳이다.

관리소를 시작으로 4.7Km를 한 바퀴 돌아보는 '사색의 길'이 조성 되어있고 사색의 길 초입에는 박인환 시인의 글이 새겨진 연보비가 새워져 있다.

산책로에서 한참 가파른 층계를 밟고 내려오니 서울 시가지가 아래로 펼쳐져있고 남산타워가 마주 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박인환의 묘가 자리 잡고 있다. 묘비엔 '세월이 가면'이 새겨져 있다. 31살의 젊은 나이에 심장마비로 숨진 천재시인은 단 몇 분 만에 술값 대신 이 시를 썼고 시는 노래로 만들어져 지금까지도 즐겨 불려지고 있다.

역동적인 소의 모습을 세심하고 강직하게 그렸던 한국 근대 화단의 대표자라 불리는 이중섭, 글 없는 비석이 전하는 침묵의 소리만 정적을 감 쌀뿐 그가 왜 여기 묻혀 있는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 죽산 조봉암, 부인과 함께 이곳에 누워있는 만해 한용은 선생, 우리의 도자기와 목공예에 심취해 문화운동을 펼쳤고 ‘한국인 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일본인’ 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아사카와 다쿠미 형제의 묘, 우두보급의 선구자인 지석영 선생, 어린이를 가장 사랑했던 소파 방정환 선생,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을 불렀던 가수 차중락의 묘도 보인다.

비석 하나 없이 번호만 있는 무덤, 봉분이 반쯤 파인 무덤, 사람의 손길이 전혀 느껴지지 않은 이름 모를 무덤엔 수북한 잡초만 쌓이고, 발에 밟히는 버려진 비석하나가 애잔하게 느껴진다. 무덤 옆 풀숲엔 무슨 사연을 빌었는지 돌탑이 쌓여있고, 돌보는 이 없는 무덤가에도 개나리꽃은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비록 대중의 기억 속엔 아무것도 남긴 것은 없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연민과 사랑을 새긴 수많은 보통 사람들도 함께 잠들어 있는 망우리는 마치 사회의 축소판처럼 여러 계층,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두루 섞여 망우라는 이름처럼 근심과 걱정 욕망을 내려놓고 편히 쉬고 있는 곳이다. 산책로 곳곳에 세워진 연대기를 보며 학창시절 들었던 역사적인 인물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는 역사의 장이기도 한 이 곳은 국립묘지 현충원 못지않은 의미를 지닌 문화재로 평가 받기도 하며 세계문화유산에 등록할 예정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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