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04.29 09:49

100년 만에 무대에 오르는 숨은 명작

시대에 스러져간 여인의 삶은 늘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감자>의 복녀가 그랬고, <테스>의 테스가 그랬고 <나비부인>의 초초상이 그랬다. 여기 또 하나의 아픔이 있다. 탈고한 지 100년이 다 돼서야 무대에 오르는 희곡 <이영녀>와 그 주인공이 겪어야 했던 시대와 현실의 무게에 대하여.

김우진은 대중에게 <사의 찬미>를 노래한 윤심덕의 연인으로 더 유명하지만 희곡사에서는 당대 문예사조를 뛰어넘는 극작가로 평가된다. 동시대 작가들이 사회 현상 등 외적인 문제를 묘사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을 때, 그는 이미 인간의 내면세계를 극으로 표현했고 자연주의를 뛰어넘어 표현주의에 이르는 선구적인 기법을 구사했다. 시인이자 극작가로서 시 작업이 주였으나 <정오>, <산돼지>, <난파>, <이영녀> 등의 희곡 또한 우리나라 극역사에 길이 남는 명작들이다. 특히 <이영녀>는 주인공의 삶을 통해 당대 여성들이 처한 현실을 고발하면서도 여성의 사회적·경제적 자각이라는 주제를 사실주의적 방법으로 다룬 최초의 장막극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여성의 주체적 삶을 고민한 최초의 장막극

시대의 비극을 온몸으로 받아낸 여자, <이영녀>
ⓒ임영환

‘커다란 두 눈에 잠긴 정숙스러운 광채와 조화 잡힌 체격, 얼굴을 덮어 누를 만큼 숱 많은 머리칼에는 이성을 끄는 청춘의 힘이 흘러넘친다. 굳세면서도 남을 한품에 끌어안아서 어루만져 위안을 줄 듯한 어떤 여성의 독특한 사랑이 넘친다. 동작과 언어에 느지막하고 힘센 일종의 선율이 있다.’

이영녀를 묘사하는 희곡의 지문이다.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오묘한 매력과 맵시를 지닌 여주인공이지만, 한눈에도 이 여인이 고단한 삶의 주인공이라는 것 정도는 파악할 수 있다.

전체 3막으로 구성된 이 희곡은 작가가 직접 목격한 사실을 바탕으로, 목포 유달산 밑 사창가의 처참한 생활을 고발한 작품이다. 김우진이 탈고한 시기는 1925년 9월 무렵이지만, 1975년 <연극평론>이 발굴해 소개하면서 세간에 알려졌다. 저자는 매춘부, 노동자, 재혼녀로 살아가는 이영녀의 삶을 통해 성과 빈곤의 극한 상황 속에서 처절하게 살아야만 했던 당시 여성의 삶을 조명하고, 그 대안에 대해 함께 고민한다. 이 작품은 1920년대 문학의 가장 큰 화두였던 빈궁을 소재로 하면서도 여성의 주체적 삶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여성의 내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인간의 존재와 행복에 대한 철학적인 고민도 함께 던져준다. 뿐만 아니라 매춘과 가난 등으로 주인공을 철저히 비극으로 내몰면서도 직접적인 표현이나 격렬한 극행위를 자제하고, 지방사투리를 적절히 구사하는 등 사실적인 기법으로 세련미의 극치를 보여준다.


국립극단, <이영녀>에 숨을 불어넣다

국립극단은 <이영녀>가 우리나라 최초의 자연주의 장막극이자 연극사에 길이 남을 명작임에도 불구하고 희곡이 쓰인 후 세기를 넘기도록 한 번도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국립극단은 최근 ‘근현대 희곡의 재발견’을 시리즈의 기획 테마로 잡고 근현대 희곡을 통해 근대를 조명하는 동시에 현대사회와 현대인이 안고 있는 문제를 인과적으로 점검하는 작업을 펼치고 있다. 2014년 <살아 있는 이중생 각하>를 첫 무대로 장식해 관객과 평단의 호평을 받았고 두 번째 작업으로 <이영녀>를 선택했다.

지금껏 한 번도 공연한 적이 없고 희곡 자체가 미완으로 평가되는 <이영녀>를 무대에 올리기로 한 이유는 무엇일까. 연출을 맡은 박정희는 이 작품을 “자본주의 사회에서 꿈을 꾸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말한다. 더 높은 이상을 위해 현실의 비루함을 온몸으로 감당해내는 이영녀의 삶이 현대인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 이 작품은 작가가 주변에서 직접 목격한 소재를 바탕으로 철저한 현장취재를 통해 작업했기 때문에 식민지 시대의 어두운 현실을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강한 설득력을 지닌다. 그로부터 10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전근대적인 삶에서 얼마나 멀리 달아나 있는가. 1920년대와 2015년을 관통하는 자본주의의 비극은, 높은 이상을 가슴에 품고 비루한 현실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네 모습을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국립극단 기획 공연 <이영녀>

시대의 비극을 온몸으로 받아낸 여자, <이영녀>
사진제공 국립극단

국립극단에서는 ‘근현대 희곡의 재발견’을 테마로 한 기획 공연 <이영녀>를 무대에 올린다. 김우진 원작으로 국내 초연이라는 점에서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세 아이를 둔 평범한 여성이었던 이영녀는 남편이 가출하자 생계유지를 위해 창녀로 나선다. 그로인해 매춘으로 감옥에 갇혔다가 우연히 부유한 기혼남을 만나 잠시 공장 여직공으로 일한다. 그러나 곧 그의 성 노리개가 되어 고통받다가 결국 공장에서 뛰쳐나와 다시 창녀가 되고, 유씨를 만나 동거하지만 그마저도 결말은 아름답지 않다. <이영녀>는 당대 여성들이 겪어야만 했던 아픈 현실에 대해 이야기하는 연극으로, 오늘날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2002 한국연극평론가협회 베스트 3, 2008 서울연극제 연출상, 2011 김상열 연극상 등 연극계의 주요 상을 휩쓴 박정희가 연출을 맡았다. 5월 12일부터 5월 31일까지. 평일 오후 8시, 토·일·공휴일 오후 3시 공연. 백성희장민호극장. 일반 3만원, 청소년 2만원. 문의 1688-5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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