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04.30 04:00

[1] 전주 한옥마을

전북 전주
500년 왕실 역사를 오롯이 품고 있는 전주는, 서양과 현대 문물이 적절히 어우러져 프레임마다 영화를 찍는 듯하다. 태조 이성계의 어진이 모셔진 경기전 너머로 전동 성당이 보인다. 영화 ‘광해’ ‘전우치’ 등의 촬영장소로도 등장했다.

"우아, 우리나라에 그런 왕조도 있었어요? 할아버지가 그런 사람? 완전 쿨하다!"

아이들의 눈빛이 영화 '장화 신은 고양이'의 그 눈빛처럼 빛난다. 웹툰이나 드라마 속 사람을 만난 것처럼 신기해한다. 조선 26대 임금 고종의 손자이자 마지막 황손(皇孫) 이석(李錫·74). 언제나 그랬듯이 아이들을 인자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안타깝죠. 중학생쯤 됐는데도 우리 역사를 모르는 경우도 있어요. 역사 같은 건 필요 없다고도 하고. 몇몇은 그저 판타지 속에 존재하는 줄 안다니까. 그 덕분에 왕실을 그리워하는 이도 생기는 건진 모르겠지만…." 봄볕처럼 미소는 환했지만 눈매는 왠지 쓸쓸하다. 그래도 입가는 단단하다. 깊은 심지가 담겨 있다. "오래 살아서 통일을 보고 죽어야 할 텐데. 정말 이젠 억울해서 그냥은 못 가겠어요. 하하."

전북여행
(위부터) 청년들이 의기투합해 죽어가던 상가를 살렸다. 남부시장 청년몰 내 공연 모습./ 태조 이성계가 ‘승전보 파티’를 열었던 오목대. 한옥마을이 한 눈에 보인다./자만벽화마을의 그림 같은 골목./최미선 여행작가·이경민 영상미디어 기자
오목대에서 시작하는 새벽

그가 전주 한옥마을 '승광재'에 정착한 지도 10년이 넘었다. "얼마 전 박근혜 대통령이 '덕분에 한옥마을도 함께 성장했다'고 하더라고. 내가 아버님하고 인연이 좀 있는데 그걸 기억하더라고요." 박정희 대통령은 전통을 지켜야 한다 강조했다 한다. 청와대 영빈관과 붙어 있는 칠궁에 황실 자손들이 살게 마련해준 것도 박정희 대통령이다. "궁녀출신으로 승은을 받아 왕자를 잉태한 분을 모신 곳이죠. 제일 큰 분이 영조대왕 어머니인 숙빈 최씨고요. 근데 1979년 10·26 사태가 일어나니 헌병 트럭으로 우릴 내쫓는 거예요. 내가 그랬죠. 난 대한민국에서 대학교를 나온 사람이다. 왕손은 사회를 모른다. 돈 개념도 없고. 빌었지만 소용이 없었어요. 아버님 다섯째 아들이 당시 문화재 관리국장인데 그 일 터지고 사흘 만에 피를 토하고 죽었어요. 난 이 나라를 떠야겠다 생각을 했고."

잠시라 생각했던 것이 불법 체류자가 됐다. 미 LA에서 남의 집 잔디도 깎아주고, 수영장 청소, 빌딩 청소를 하며 겨우 돈을 모았다. 안 먹고 안 써 5만달러란 거금을 모았다. 사회보장번호도 얻고 은행에서 융자도 받아 흑인 거주 지역에 작은 수퍼마켓을 차렸다. 흑인들이 '기분파'라 돈도 잘 쓴다는 얘길 들어서다. "그때 하루 다섯 갑씩 담배를 피웠어요. 언제 강도가 들이닥칠지 모르니까. 초범들은 총을 들면 지레 겁을 먹고는 손을 떨어요. 오히려 그게 더 두려워. 열세 번째 강도가 한인 청년이었어요. 장총을 얼굴에 들이대는데…. 제 지갑을 보고는 뒤에 있던 멕시코 청년이 '꼬레아노끼리 쏘지 말라'고 하더군요. 그걸 마지막으로 제 10년 미국 생활을 접었어요. 마침 이방자 왕비도 돌아가셨고."

현재 황실문화재단 총재를 맡고 있는 이석은 매일 아침이면 오목대를 오른다. 이 총재의 안내에 따라 오목대로 향했다. 가파르긴 해도 계단이 있어 어렵지 않다. 연인들이 서로를 찍어주며 행복한 표정이다. 한옥마을 전경이 한눈에 보인다. 오목대에 누워본다. 왕들이 벌인 파티의 현장. 지금은 연인·가족의 쉼터로 자리를 내줬지만 언제나 이곳엔 기쁨이 넘친다. "태조 이성계가 남원 황산벌에서 왜구와 싸워 대승을 이루고 개경으로 가다 파티를 벌인 곳이에요. 얼마나 기뻤겠어요. 고종황제가 쓴 비석도 남아 있어요. 그걸 볼 때마다 '조상님이 날 보호해 주겠지' 하는 생각이 들고…." 인생이란 건 언제나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살아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도 예외는 아니다.

한옥마을 승광재 앞에서 포즈를 취한 이석 황실문화재단 총재.
한옥마을 승광재 앞에서 포즈를 취한 이석 황실문화재단 총재. 항상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다닌다. /이경민 영상미디어 기자
그럼에도 살아야 한다… 자만벽화마을

"나이 50이 됐을 때 오대산으로 향했어요. 머리 깎으려고. 그때 월정사 주지가 그러는 거예요. '황손 가수 이석씨 아닙니까. 팬입니다' 하며 나를 뒤쪽 계곡으로 안내를 해요(그는 국민가요로 불린 '비둘기집'을 부른 가수이기도 하다). 세조대왕의 피부병을 고친 데가 여기라고. 몸이든 마음이든 병이 싹 낫는 곳이라고. 그러면서 '스님 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오. 260가지를 지켜야 하오.' 난 죽었구나 했지. 스님이 이래요. '이석씨는 노래를 잘하니 대중에게 기쁨 주고 착하게 살면 그게 부처 아닙니까?' 그래 내가 잘하는 걸로 즐겁게 살자 했죠." 그길로 마이크를 다시 잡았다. 대단한 무대는 아니었다. 서울 청담동 '샤또'라는 클럽이었다. 당시 술집 사장이 그가 1967년 월남전 참전 뒤 노래하던 인천 올림푸스 호텔 웨이터였다. 인연이란 그런 것이다. 언제 어디서 다시 만날지 모른다.

풍류가 대단했다. 하지만 인기도 한때. 60세가 다 돼가니 그를 찾는 횟수도 줄었다. 기억하는 이도 적어졌다. 지금은 헤어진 그때의 아내와 함께 강남에서 참치집을 차렸다. 어찌나 잘되는지 돈다발 세기가 힘들 정도였다. 화무십일홍이라 했는데 그렇게 호사스러웠던 기억은 겨우 1년 반이다. IMF 외환 위기와 함께 가게도 침몰했다.

바닥이란 건 거꾸로 디딜 수 있다는 말도 된다. 고꾸라졌지만 다시 도약하려 했다. '내가 누군가.' 황실보존국민연합회를 창설했다. 초대 총재가 됐다. 그 뒤 황실문화재단으로 이름을 바꿨다.

이번에 그의 발목을 잡은 건 외로움이었다. 모두가 흥겨웠던 2002 한·일월드컵. 그는 돌봐주는 이도, 기억하는 이도, 함께 웃어주고 울어주는 이도 없이 혼자 지냈다. 2003년 술을 먹고 자살을 시도했다. 마지막 자살 시도. 아홉 번째였다. 생과 이별하려던 그를 설득한 건 신문기자였다. 찜질방에서 쓰고 있던 유서를 주간조선 기자가 발견했다. 그는 다시 세상에 나왔다.

이 총재가 머무는 승광재에서 걸어서 20분 정도 나서 둘레길을 걷다 보면 왼편으로 색색의 벽을 마주하게 된다. 깎아지른 듯한 산등성이에 집들이 골목 속의 그림처럼 포개져 있다. 가난했던 마을이 재치 있는 벽화를 입고 예술촌이 되면서 젊은이들의 명소가 됐다. 카페가 들어서고 밤늦게까지 불을 밝힌다. 나를 알아봐주는 그 누군가가 존재하기에 우리는 사는 건지도 모르겠다. 운명도 그렇게 바뀌나 보다.

◇장대한 아름다움의 경기전

한옥마을의 서문 밖은 일제 침략 시 일본 상인들의 주 거주지였다. 그러다 전주 최대 상권을 이루고 한국인들은 핍박 대상이었다. 이에 대한 반발로 교동과 풍남동 일대에 한옥촌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일본식 주택에 대한 대립과 민족의식을 내세우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풍남동 일대는 서양풍의 선교사촌과, 전동성당을 필두로 하는 고풍적인 교회당, 팔작지붕이 휘영청 늘어진 한옥의 오묘한 어울림이 왠지 아련해지는 곳이다.

한옥마을 경기전은 이 총재가 매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들르는 곳이다. 경기전은 태조 이성계의 어진(왕의 초상화·국보 제317호)을 모시기 위해 태종 10년(1410년)에 지은 것이다. 현존하는 이성계의 유일한 어진을 볼 수 있다. 경기전 밖으로는 전주의 명물 전동 성당 윗부분이 살짝 걸친다.

태조 외에도 세종과 영조, 정조 등 여섯 임금의 '용안'을 마주할 수 있다. "처음엔 면목이 없지. 내가 참 패륜아처럼 살았어요. 나를 혹사시킨 거지. 세상이 밉고 싫으니까. 여섯 번째 자살을 시도했을 때 도봉산 바위에서 몸을 던졌거든요. 눈을 떠보니 나무에 걸린 거야. 여기 와선, 이제 값지게 살자. 상해 임시정부 세우려고 그렇게 노력했던 고종황제의 뜻을 거룩히 생각하자. 아버지도 보훈처 올라갈 수 있도록 해야겠다. 그런 생각이 강해요. 운동도 열심히 하고." 조선조의 발원인 전주는 그에게 고향 이상의 뜻을 갖는다. 요즘 그가 역사의식 고취를 위해 강의도 적극적으로 나서는 게 그런 이유다. 해설사 등과 함께 젊은이들이 단체로 방문하면 그의 마루도 아낌없이 내준다. 가끔은 정치인들이 그를 찾기도 한다. '황실 기를 받겠다'며 그의 이불을 가져가 덮는 이도 있다. 그럴 때마다 "난 정치는 모른다"며 거리를 둔다.

이 총재는 항상 고운 한복을 입는다. 처음엔 그가 거의 유일했다. 두루마기를 입고 골목을 나서면 "오래 사십시오" "행복하십시오"란 말이 도처에서 온다. 사인 받겠다는 아이도 있다. 재밌는 건 요즘 이곳에 '한복 빌려 입기'가 유행이다. 4시간에 1만원 정도. 차려입은 이들이 어찌나 곱던지 봄꽃이 따로 없다. 이 총재는 하루에 보통 4㎞ 정도 마을을 걷는다 했다. 둘레길 외에도 각종 길이 잘 닦여 있어 걷는 데 어렵지 않다.

"아버님이 날 62세에 낳았어요. 나도 돌이켜보면 그 비슷한 시기부터 새로운 삶을 찾은 듯해요. 역사 문화 교수로, 해설사로, 총재로 이제부터라도 추앙받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소원? 할 수만 있다면 아들도 하나 더 낳고 싶고….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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