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이 만난 사람] "늘 더 가지려고 집착… 반복되는 이런 삶 진부해"

동백섬을 한 바퀴 돌고 커피숍에 앉자, 신옥진(68)씨는 잠깐 끊겼던 말문을 이어갔다.

"맨날 더 가지려는 데만 집착했지, 늘 반복되는 이런 삶이 문득 진부해 보였어요.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이걸 한번 놔보자, 이제라도 신세진 걸 갚고 가야겠다고 생각한 거지요."

'부산공간화랑' 대표인 그는 그림을 사고파는 화상(畵商)의 본업을 거의 잊어버린 것 같았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두 손을 툭툭 털듯이 자신이 소장했던 작품들을 그냥 내놓기 시작했다. 그 숫자가 800여점에 이른다. 기증받은 미술관의 소속 시도(市道)마다 그에게 준 명예시민·도민증만 여섯 개다.

1998년 부산시립미술관에 30점을 기증한 게 시작이었다. 미술관 측에서 놀라 '신 사장님, 그림 장사를 이제 안 하려고 합니까?'라며 전화를 걸어왔다.

"당시 병석에 누워있으면서 '이 세상에 왔으면 뭔가 한 가지는 내가 얘기하고 가야 하지 않겠나'는 마음이 들었어요. 하지만 자고 나니까 '요것들 한 점 한 점을 내가 얼마나 어렵게 사서 모았는데' 하는 생각에 하기 싫더라고. 하루를 미루다가 '이거 안 되겠다' 싶어 팩스로 기증 목록을 미술관에 넣어버렸어요."

―마음이 오락가락 바뀔까봐서요?

"어떨 때는 내 마음을 믿지 못해(웃음). 하지만 기증하고 나니 성에 안 차는 걸 기증했다는 기분이 들어요."

―그건 또 무슨 소리죠?

"내가 아끼는 작품은 안 내놓고 덜 아끼는 걸 기증했다는 거죠. 명색이 화상(畵商)이고 그림 보는 안목으로 먹고살아왔는데, '저런 작품을 기증했으니 저 사람 안목이 저 정도인가' 하는 말을 들을 것 같더라고. 미술관 측에 '바꿔주겠다'고 했지만 절차상 번복이 안 돼요. 그래서 더 좋은 걸로 추가 기증을 해 100여점이 됐어요."

―그건 그렇다치고, 그 뒤로 기증을 계속 한 데는 또 어떤 동기가 있어서?

"해놓고보니 기증 작품들의 '방향성'이 없는 것 같아. 남들이야 그런 생각까지 안 하지만, 항상 당사자가 답답한 거지. 그래서 일본의 근·현대 미술작품 150여점을 사 모아 기증한 거지요."

―왜 하필 일본 작품들을?

"우리나라 서양화 1세대들이 다 일본에서 공부를 하고 왔잖아요. 좋든 싫든 일본미술을 알아야 극복이 되니까. 우리가 영향 받은 그 연대(年代)의 일류 작가들을 선정해 사 모았어요. 몇 년에 걸쳐 마음에 드는 작품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어요. 경제적으로 힘이 들어 마지막에는 갈등이 많았어요."

―기증하는 게 쉽지 않군요.

"사실 파는 것보다 기증이 더 어려워요. 내가 객관적으로 봐서 '이 정도면 됐다'는 선을 지켜야 하니까. 자신은 그걸 알죠. 자신을 안 속이면 남을 속일 일도 없지요."

―지금까지 모두 800여점을 기증한 걸로 아는데, 이렇게 돈과 개인적인 소장 작품들이 많은 줄 몰랐습니다.

"이런 오해를 받는데, 내가 기증한 작품들은 값비싼 것들만 아니라 전문가의 식견으로 미술관에 필요한 것들을 기증한 거지. 지금 서울대미술관에 60점을 기증하는 절차를 밟고 있는데 이걸로 끝입니다. 집에 남아 있는 것들은 내놓아서는 안 되는 가치가 없는 작품들뿐이죠. 작가 스스로가 폐기했어야 할 수준이지요."

가정 형편과 결핵으로 그의 학력은 중학교까지였다. 그 뒤 도서관에서 무작정 어려운 책을 몇 년간 읽어낸 독학(獨學)이 그를 키웠다고 한다. 그림에 소질 있던 그는 지방지에 시사만화를 게재하기도 했고, 서울신문 편집기자로 2년간 근무했다. 하지만 지병인 결핵으로 그만두고 부산에 내려와 수술을 받았다. 그 뒤 부산 화가들의 권유로 화랑업에 뛰어들었다.

"처음엔 다방을 하면서 미술 작품을 전시했어요. 지역 예술인들의 사랑방처럼 됐는데 찻값 외상으로 2년 만에 문을 닫았어요. 그 뒤로 작품을 들고 병원이나 변호사 사무실로 팔러 다니는 보따리장수를 하다가 지금의 화랑을 열었어요."

'부산공간화랑'은 현대화랑 등과 함께 1세대 화랑에 속한다. 올해로 40년을 맞았다. 지방(부산)에 있다는 불리한 여건에도, 그는 장욱진·박고석·이우환 등 대가(大家)들과 친분을 쌓았고 이들의 개인전을 유치했다.

"화랑을 열고는 한 달에 한 번 서울에 올라갈 때마다 장욱진 선생(1917~1990) 집을 찾아갔어요. 그 집 가정부는 '안 계신다'는 말만 해요. 그때마다 '이런 사람이 왔다갔다고 전해달라'며 내 명함을 붙인 케이크를 전달했어요. 그걸 3년간 했어요."

―얼굴도 못 보고 그렇게, 짝사랑하는 것보다 더 심하군요.

"나야 아무 존재도 아니었으니까(웃음). 당시 뭔가 홀렸나 봐. 그날도 가정부에게 케이크를 주고 돌아서는데 '선생님이 들어오시라고 합니다'라고 해요. 방안에서 혼자 막걸리를 마시고 있던 장 선생이 내 손목을 잡으며 나가자는 거요. 길 건너 포장마차야. 인연이 그렇게 시작됐어요."

―장욱진 작품은 좀 받았습니까?

"실제 팔 만한 작품은 못 받았어요. 이분이 수안보에 내려가 살 때도 심심하면 나를 불렸어요. 화랑 임대료가 밀려 있고 돈 나올 데가 없을 때라 '이번에는 주겠지'하고 멀리까지 사력을 다해 가면 그림 얘기는 없어. 팔씨름 하자거나 술 먹자는 거뿐이었어요. 어느 날 빈손으로 돌아오는데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어 눈물이 막 쏟아지는 거요. 하지만 그 뒤에도 부를 때마다 가고 또 갔어요."

―박고석 선생(1917~2002)은 어땠나요?

"이분은 '좋은 그림은 못 그리더라도 무식한 그림을 그려서는 안 된다'고 얘기했죠. 집에 가면 캔버스는 늘 펼쳐 있는데 일년을 두고 완성되는 게 없어요. 한번은 내가 답답해 '산에 구름 하나 더 그려보시죠' 했더니, '그려볼까' 하며 그려요. 그 작품이 완성돼 '나한테 주이소' 하니까 '박명자(현대화랑 대표)한테 줄 게 많이 밀려 있어'라고 해요. 이 대가(大家)들을 만나 돈벌이는 안 됐지만, 젊은 날 내가 정신적으로 클 수 있었어요."

―민중미술가 오윤이 1986년 죽기 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상업화랑 전시를 한 곳이 부산공간화랑에서였다면서요?

"여기에 내려왔을 때 반짝반짝 윤이 나는 금반지를 끼고 있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보온병에 담은 미음을 조금씩 마시고 식사는 제대로 못했어요. 작품 가격이 아주 쌌어요. 전시 작품 3분의 1쯤 팔았고 나머지는 돌려줬어요. 전시 끝나고 보름 뒤 이분이 죽자 '작품 구할 수 없느냐'며 전화가 빗발쳤고, 가격도 폭등했지요."

―특히 이우환 선생과 인연이 깊다면서요?

"1980년대 초에 지인이 '이우환 선생이 지금 고향에 가는데 애들 과자 값이 좀 필요하다'며 우리 화랑에 모시고 왔어요. 신문의 해외토픽난에 나던 분인데 운동화를 신었고, 뭐랄까 소박한 모습에 놀랐어요. 6호짜리 두 점을 내놓았어요. 가격이 얼마냐고 물으니 42만원이라고 해요."

―42만원이면?

"그때만 해도 국내에서 이분 작품이 거래된 적 없어 가격대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는 상태였어요. 하지만 사줘야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통장에 든 화랑 운영비 48만원에서 찾아서 줬어요. 한 점만 산 거죠. 이분이 허리를 굽혀 두 번이나 인사했어요(현재 그 그림은 1억2000만원대)."

―작품을 처음 봤을 때 어땠나요?

"황당했지요. 구상작품을 보아온 습관 때문에, 점을 찍거나 선을 그어놓은 걸로 작품이라고 하니. 어떤 것은 바윗돌 몇 개와 철판을 설치해놓고는…. 그의 작품은 '개념미술'입니다. 왜 이런 작품이 나올 수밖에 없는지, 다 철학적 배경이 있고 국제무대에서 검증된 겁니다. 한국 작가들 중에서 백남준과 그만이 세계 미술사에서 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요."

10년쯤 지나 이미 세계적인 스타가 된 이우환이 다시 찾아와 국내 첫 개인전을 그에게 맡겼다.

"전시 작품이 매진됐어요. 경제적으로 내게는 큰 도움이 됐어요. 이분은 너무 철두철미하고 예민해 날마다 수면제를 먹어야 잠들어요. 내가 마음 다스리는 법 같은 걸 말하면 '그건 그쪽 사람들이나 하면 된다. 세계 무대에는 너무 경쟁이 치열해 잠깐 한눈팔면 20~30등 밑으로 떨어져버린다.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그걸 용납할 수 없다'고 해요."

―현재 국내 화가 중에서 이우환 작품이 가장 비싸고, 1970년대 작 '점으로부터' '선으로부터'는 40억원대에 거래된다면서요?

"과거에 몇 점 소장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가격이 오르지 않을 때 팔거나 기증했어요. 내 사주에는 '돈'이 없어요."

―선생은 '돈은 기술적으로 벌고, 쓸 때는 예술적으로 쓴다'고 했나요?

"돈을 가지고만 있으면 그건 숫자에 불과하지 아무 가치가 없어요. 돈은 쓸 때 이벤트가 되고 재미있는 거예요. 10분의 1씩 기증하는 문화가 생겨나면 우리 사회가 훨씬 재미있어질 겁니다."

―안락한 노후 생활은 생각 안 해봤습니까?

"지금 오래된 아파트(100㎡)에 살지만 못 먹고 사는 것도 아니고. 작품 거래로 부자들을 많이 만나보면 바깥에서 보는 것과 달라요. 속을 보면 다들 개판이오. 돈을 쌓아서 해결되는 게 많지 않다고. 물질은 허망한 거요."

―화랑에 아들(38)이 일하고 있던데, 자식 입장은 안 돌아봤습니까?

"불만 없을 거요. 그전부터 대학까지만 지원한다고 했으니. 내가 다 해주면 무슨 재미로 살겠어요. 그러면 자기가 할 게 뭐 있노."

―자식이 맨땅에 생고생하는 것보다는 물려받은 기반 위에서 편안하게 살면 좋잖아요. 일해서 돈 모으는 재미에는 자식한테 물려줄 수 있다는 것도 포함돼 있지 않을까요?

"부부나 부자 관계에도 '타인의식'이 있어야 해요. 이게 '내 마누라다' '내 남편이다' '내 자식이다' 하면 상대를 제대로 못 보는 거요. 기대심리가 많으면 상처받기도 쉬워요. 제 삶은 자기가 개척해야지."

―요즘 젊은 세대는 선생 세대와는 다르잖아요?

"나는 훨씬 더 악조건 속에서 병을 달고 살아왔는데 무슨 말씀을. 내가 이런 시를 썼어요. '사람들은 걷고 있지 않았다. 흘러가고 있었다'라고. 자기 발로 안 걷고 그냥 떠내려가는 거요."

1박 2일간 얘기했는데도 뭔가 미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