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인의 '오늘'이 모여 歷史가 되죠"

"현대 도시인의 일상은 역사의 층위(層位)에서 가장 겉에 있는 표피입니다. 이런 삶의 현장들이 쌓여 역사가 되는 거지요."

뉴욕 퀸스 루스벨트 지하철역 풍경을 담은 가로 4.5m, 세로 3m 대작 '트레인 루스벨트역' 앞에서 화가 서용선(64)이 진지하게 말했다. 그림 속 백인 경찰관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쑤셔 박고 동료와 한담을 나눈다. 헐렁한 민소매 차림 흑인 부부는 멍하니 역을 바라보고, 중국계 노동자는 피로에 절어 한 손으로 벽을 짚고 있다. 등장인물마다 화가의 시선에 잡힌 그들만의 사연이 담겨 있다. 전시장엔 작가가 독일 베를린, 호주 멜버른, 중국 베이징, 서울에서 만난 사람을 그린 작품 100여점으로 가득하다. 서울 경복궁 옆 삼청동 길을 따라 위치한 금호미술관과 학고재갤러리에서 동시에 열리는 '서용선의 도시 그리기: 유토피즘과 그 현실 사이'전(17일)이다.

6·25, 단종 폐위, 마고 신화 등 우리 역사를 뚝심 있게 그려온 이 중견 작가가 이번엔 '세계의 현대인'으로 지평을 넓혔다. 도시인을 그려오긴 했지만 줄곧 서울 도심의 민초였다. 순수 국내파로 우리 그림의 정체성을 고민해온 작가의 눈은 늘 우리 자신을 향했다. 의식적으로 그림에 외국 사람도, 영문 알파벳도 담지 않았다.

그랬던 그의 작품에 노란 머리 경찰이, 알파벳 선명한 외국 지하철역 이름이 등장한다. "지금 보니 우리 것에 너무 집착하면서 좀 오그라져 있지 않았나 싶어요. 경직된 생각을 틔우고 시야를 넓히는 게필요하다 싶었지요." '가르치며 소진한 에너지를 세상 공부로 재충전하기 위해' 정년을 한참 남겨두고 2008년 서울대 교수직을 관뒀던 그는, 해외 레지던스(작가 입주) 프로그램을 돌면서 그곳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봤다.

단종에서 뉴욕 지하철 행인까지의 간극은 멀어도 여간 멀어 보이는 게 아니다. 연결고리는 무엇일까. "내 관심은 역사 자체가 아니라 역사적 사건을 둘러싼 사람들의 관계, 살려는 개인의 의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휴대전화를 들고 전철을 타는 저 멀리 외국 도시인의 삶도 결국 역사의 한 단면이지요."

화폭에 서양인을 담았지만 생김도, 체구도 동양인과 잘 구분이 안 된다. 작가는 "내 안의 배타성이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와 자꾸만 내 틀에 맞춰 외국 사람들을 바라보게 되는 것 같다. 스스로 반성하게 된다"며 웃었다.

전시장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두 가지가 있다. 2층 전시장 한쪽 벽면에 소박하게 걸린 작은 영상 모니터와 그 앞에 놓인 평범한 탁자다. 모니터에선 베를린의 알렉산더플라츠에서 만난 길거리 가수가 휴대전화로 자신을 촬영하던 작가를 제지하는 장면부터 경기도 양평 작업실 모습까지 일련의 작업 과정이 나온다. 작가가 "반(半)작업, 반(半)기록"이라 부르는 영상작이다. 그 앞으로 식탁처럼 생긴 탁자가 생뚱맞게 놓여 있다. "미술관에 들어서면 늘 감시당하는 느낌이 듭니다. '내 작품 봐라'고 강요하는 게 아니라 '여기 앉아 이런저런 생각할 시간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투박하지만 정감있는 작가의 배려다. 그림 이면의 것을 조금이라도 꺼내 교감하고픈 작가의 마음이다.

전시 문의 (02)720-5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