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하 절기가 지났다. 아침이 일찍 오고 서산에 해가 늦게 기운다. 중천으로 가는 해가 느리기만 하다. 모내기를 위한 논에 물을 담고 논바닥을 고르기에 농부의 일손이 바빠진다. 논바닥을 고르는 농부의 주변에서 먹이를 찾는 하얀 학이 정겨운 풍경을 만든다.
삭막한 도회 생활에 염증을 느끼거나 밥벌이가 마음 같지 않아서 시골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려고 마음먹는 사람들을 종종 만난다. 요즘 세상에 많이 회자하고 있는 귀농이나 귀촌이 그런 현상이다. 귀농은 말 그대로 시골로 내려가서 밥벌이로써 농사를 짓는 직업인이 되는 경우다.
귀촌은 복잡한 도시생활을 벗어나 농촌 마을에서 주거하는 형태의 생활을 말한다. 도심 생활의 편리성을 유지하면서 자연환경 속에 살려는 의도로 세컨하우스(두 번째 집)를 지어서 5일은 도시에서 보내고 주말이나 휴일인 이틀 정도는 전원형 마을에서 지내기도 한다. 자연이 그리워서다.
우리는 대개가 휴일이나 휴가 때에 둘러본 농촌 생활에 대하여 환상을 가지고 있다. 그런 마을에서 실제 살아보면 상상했던 것과 많은 차이가 남을 발견하게 된다. 다시 도회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농사일의 어려움과 지역 주민과의 어울림의 문제 등이 주된 이유다. 특히 농사일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농사는 천심(天心)을 읽을 수 있어야 제대로 지을 수 있다. 부지런하지 못하면 지을 수 없다. 농사는 아무나 하나?
사회 초년병 때의 일이 생각난다. 회사가 어려워 구조조정을 하던 무렵이다. 업무를 마치고 직장 동료들과 소주를 마시며 세상 사는 이야기를 주고받던 중 후배 한 사람이 이런 얘기를 하였다. 자기는 직장생활이 여의치 못하면 농사를 지을 것이라 했다. "안 되면 농사나 짓지 뭐"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버럭 화를 냈다. “농사일이 누구 집 강아지 이름이냐!”고 말이다. 그 후배는 되레 놀라서 나에게 되물었다. 왜 그리 화를 내느냐고 말이다.
농사는 아무나 짓지 못한다. 도회에서 생활이 여의치 못하면 돌아가 지을 수 있는 농사가 아님을 어릴 때부터 경험하고 눈으로 보아왔기 때문이다. 할 일이 없으면 그냥 쉽게 지을 수 있는 농사일이 아니다. "농사나 짓지."라는 말이 마치 땀 흘려 일하는 농민을 우습게 보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화를 냈다.
한 톨의 벼가 익기까지에는 헤아릴 수 없는 농부의 손길이 간다. 어머니 뱃속의 태교에서부터 청소년기를 거쳐 대학 시절까지도 농사를 눈여겨보며 자랐고 실정을 잘 알아서다. 때로는 모도 심고 지게도 지고 타작도 하였고 똥장군을 져 논에 나르기도 하였다. 농사는 부지런함과 뿌린 대로, 땀 흘린 만큼 거두고 콩 심은 데 콩 난다는 진실을 믿는 자만이 할 수 있다.
자연의 섭리를 경외하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예고하지 않았던 태풍과 가뭄을 인내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의 능력에 한계를 느끼게 하는 자연의 조화에 승복할 수 있는 자만이 지을 수 있다. 느긋하게 기다릴 줄 아는 자만이 할 수 있다. 한 톨의 씨앗에 피땀을 쏟을 수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다. 한 톨의 씨앗이 곧 우주임을 알아야 한다. 비바람과 태양을 머금고 익어가는 결실의 모습에 흥겨워 할 수 있는 마음의 소유자만이 즐길 수 있다.
사람들은 쉽게 농사일을 말한다. 휴가를 맞아 찾는 농촌의 환상적 모습만 있지 않다. 저녁이면 저녁 짓는 연기가 지붕 위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한가하고도 여유로운 농촌의 모습에 감성적일 수 있다. 농사는 감성으로 되지 않는다. 한두 번 해 본 농사일이 쉬워 보일 수도 있다.
일 년 내내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흙과 냄새나는 거름과 함께 하는 생활은 어지간한 인내 없이는 견디기 힘든 일이다. 잠시라도 몸을 편히 하지 못하는 것이 농사다. 머리를 써야 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주로 몸으로 해야 하는 일이다. 게으른 자의 논과 부지런한 자의 논은 다르다. 그 결과도 다르게 나타난다. 많은 땀을 흘린 자 많이 거두게 된다. 땅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농심(農心)이다.
세계화의 물결 속에 개방되어야 하는 현실 앞에 농민의 경쟁 치열함도 도사리고도 있다. 농사일의 좋은 점도 많지만 쉽게 접근하여서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농심을 이해하는 자만이 웃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