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05.22 10:09

[시니어 에세이] 자동지우개와의 전쟁

요즘 들어 부쩍 물건을 어디 두었는지 깜빡깜빡한다. 물론 내 머릿속 지우개가 등장한 지는 오래되었다. 이 지우개는 성능이 아주 좋은지라 순식간에 내 기억들을 지워 버리곤 했다. 나도 대책이 필요했다. 비상등 하나를 켜두고 물건을 놓을 때는 생각의 되새김질까지 하고 놓아두곤 했다. 그런데 무슨 조홧속인지 생각의 되새김질이 길면 길수록 물건은 어디로 갔는지 찾을 땐 더 난감해지니 무슨 조홧속인지 모르겠다.

가끔 어떤 장소에 가서 ‘내가 여기 왜 왔지’라고 생각할 때는 기본이고, 휴대폰을 손에 들고도 휴대폰을 찾아 온 집안을 헤매고 심지어 냉장고 속까지 들여다본다. 언젠가 냉장고 속에서 휴대폰을 발견한 기억을 잘도 기억하고 있는 탓이다. 참 쓸데없는 기억은 지워지지도 않는 모양이다. 예전에 내 엄마가 그리할 때는 차마 말은 못하고 속으로만 ‘어휴, 맨날 찾아요. 찾아’ 라고 비웃기까지 했다. 그냥 그런 일은 남의 일인 줄 알았다. 내게 그런 일들이 일어나리라곤 생각지 않았다.

머릿속 기억력 하나는 좋다고 자부했었다. 그런데 자꾸 이런 일들이 반복되니 머리에 배신당하는 느낌이 든다. 머리에 좋다는 호두나 땅콩 이런 것들을 자주 먹어 주어 살살 달래는데도 이 모양이니 어찌 배신감이 들지 않겠는가. 역시 나이는 못 속이는가 싶다. 어느 날, 친구 모임에 나갔다가 내 ‘건망증’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랬더니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친구들이 이구동성으로 자신들의 경험을 털어놓느라 그날의 모임은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얘, 나는 차 위에 백 올려놓고 그냥 운전하고 나갔다가, 그 백이 내 차 앞 유리창 앞으로 곤두박질치는 바람에 사고 난 줄 알고 기겁했어” “차 몰고 차 한 잔 마시려고 수종사 갔다가 집에 돌아오는데 내가 버스에 앉아있더라. 내 차는 수종사에 얌전히 두고 말이야.” “크크큭, 난 김치 담그려고 찹쌀풀 쒀놓았었어. 나중에 김치 담그려고 하니 안 보여. 좀 전에 컵 몇 개 씻은 남편 생각이 나서 왜 안 하던 짓까지 해서 김치도 못 담게 하느냐고 구박했지. 신랑도 내가 했었나 하는 표정인 거야. 그래서 신랑이 한 것으로 결론 냈지. 나중에 자려고 누웠는데 내가 설거지하다가 그냥 확 버린 게 생각나더라. 신랑한텐 말도 못하고 혼자 웃었지.”

재밌고도 아찔아찔한 이야기들이 무한정 쏟아져 나온다. 너나 할 것 없이 건망증 이야기로 넘쳐났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하나같이 모두에게 눈물 찔끔거리도록 웃게 만드는 황당한 이야기이었다. 황당하면 황당할수록 웃음의 농도는 더욱 진해졌고, 그 유쾌함으로 인해 우리는 오랜만에 행복했다. 기억이 안 날 때야 물론 속 터지고 그 황당함에 울고 싶었다. 이게 치매가 아닌가 싶어 겁도 났다. 창피스러운 마음에 누군가에게도 털어놓지도 않았던 이야기이다. 그런 이야기들이 시간이 흘러 돌이켜보니 더러는 슬프고 짜증나고 화나는 일도 이렇게 유쾌하고 신나는 일상이었음을 깨닫는다.

어쩌면 한평생 너무도 열심히 살았기에 더 그런지 모르겠다. 미국 작가 나대니얼 호손이 말 한 것처럼 ‘행복은 우리가 말하지 않아도 어깨에 내려앉는 나비와 같다.’고 했다. 나비가 내 어깨에 내려앉는 일은 전혀 예기치 않았기에 만약 내려앉는다면 황당하면서도 행복한 일이다. 그런 것처럼 어떤 작은 실수들이 돌이켜보면 이렇게 우리를 행복하게 할 줄을 주가 알았겠는가. 어차피 살면서 가는 길은 한 번 뿐이다. 그러니 어설픈 실수들이야 당연하다. 스트레스를 받고 속상해하기보다는 ‘그럴 수도 있지 뭐‘ 하는 대범함이 필요한 나이다.

그렇지만 어딘가 찜찜하다. 내 머릿속 지우개를 이기려면 대책이 필요했다. 메모를 하기 시작했다. 머릿속 지우개와 전쟁을 벌인 셈이다. 메모 따위는 안 하고 살았었다. 반짝거리는 내 기억에 의존해 살았는데 이젠 그 시절은 갔음을 인정하는 셈이다. 나날이 내 머릿속 지우개가 디지털 성능을 높여가는데, 이것에 대적하는 방법은 지극히 아날로그적이다. 생각해 보면 참 아이러니하다. 그러나 이 방법만이 유일한 수단이다. 아무리 성능 좋은 머릿속 지우개도 적어놓은 메모까지 지우진 못 할 테니까.

지성무식(至誠無息)이라는 말이 있다. 중용에 나오는 말이다. ‘삶을 함부로 대하지 말며, 항상 성실하게 성의를 다해야 한다.’는 뜻이다. 은퇴한 후 내가 삶의 지침으로 정한 말이다. 나태하기 쉬워지는 삶에 그냥 죽는 날만 기다리는 것은 삶에 대한 모독이란 생각이다. 하루하루를 열심히 정성껏 열심히 살아가려 한다. 그렇게 살다 보면 어차피 처음 가는 길인데 황당한 실수야 있는 게 당연지사려니 생각하고 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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