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조선>은 스위스의 시계 도시를 탐방하며 시계의 역사와 장인정신을 돌아보는 칼럼을 연재한다. 스위스 시계산업의 근원지부터 현재 가장 많은 시계 브랜드가 들어선 곳, 그리고 스위스 각지의 시계 관련 산업과 장인들의 마을 등 다양한 이야기가 펼쳐질 예정이다. 연재를 맡은 시계 컨설턴트 이은경 씨는 “지금까지 스위스를 알프스와 은행의 나라로 인식했다면, 이번 칼럼을 통해 스위스 메이드 시계를 더 깊이 이해하고, 또 시계의 진정한 가치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며 포부를 밝혔다. 첫 번째 칼럼에서는 스위스 시계가 태동한 도시, 제네바로 여행을 떠나본다.
제네바는 스위스 시계의 성지라 할 수 있다. 각 종교에도 그 종교가 처음 생겨난 곳을 성지라고 부르듯이, 스위스 시계산업이 시작된 시계의 성지는 바로 제네바다. 궁극의 워치 브랜드인 파텍 필립부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시계 브랜드인 바쉐론 콘스탄틴, 부동의 1위 브랜드 롤렉스 등 시계 애호가라면 누구나 갖고 싶어 하는 시계 브랜드의 본사가 위치한 곳도 바로 제네바다.
신교도 정착과 함께 시작된 스위스 시계의 역사
스위스 시계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알아야 할 인물은 유명 시계 브랜드 창업자나 천재적인 워치메이커가 아니라 16세기의 종교개혁자 존 칼뱅이다. 1541년 존 칼뱅은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출신의 신교도들을 데리고 제네바에 정착했다. 칼뱅은 성서 중심주의를 바탕으로 인간의 구원은 신에 의해 미리 정해져 있다는 예정설을 주장했고, 직업에 충실한 것이 구원의 증거라는 이론으로 상공업 종사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검소한 생활을 중시하던 칼뱅은 금이나 다이아몬드 같은 화려한 사치품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칼뱅이 제네바로 이주하기 이전에 제네바 원주민 대부분은 귀금속 세공이나 에나멜링 등 화려한 장신구를 만들어 팔던 사람이었다. 칼뱅과 함께 이주한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등에서 이주한 신교도들은 귀금속 금지로 더 이상 장신구를 만들 수 없었던 제네바인들에게 시계 제작법을 본격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제네바 시계 제조, 즉 스위스 시계 제조 역사의 시작이다.
1601년에는 제네바에서 세계 최초로 ‘시계제조업자조합’이 결성되었다. 1685년에는 위그노라 불리던 프랑스 신교도들이 신교박해를 피해 프랑스 접경 지역인 제네바에 정착하면서 제네바의 시계산업은 더욱 발전했다. 17세기 후반에는 제네바의 무역업자와 장인들로 구성된 공방협회가 설립되었고, 장인들이 서로 협력하여 주얼리, 금 세공품, 시계를 제작하고 판매하기 시작했다.
시계산업의 부흥과 제네바 실의 탄생
이후 스위스 시계산업은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18세기 말 제네바는 터키, 인도, 중국 등 전 세계로 6만 개 이상의 시계를 수출하기에 이르렀다. 제네바는 이미 포화 상태였고, 업체 간의 경쟁도 치열했기에 제네바 북쪽의 쥐라 산맥으로 시계산업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제네바는 고급 시계의 대명사였다. 결국에는 제네바 명칭을 남용하는 일이나 모조품이 많아졌고, 1886년 제네바 주는 위조와 모조품을 방지하기 위해 ‘제네바 실(제네바 홀마크)’을 법령으로 공표했다.
제네바 실은 시계의 출처, 내구성, 정확성과 시계학적 전문성에 관하여 진정한 최고급 시계임을 보장하는 제도다. 설립 이후 지금까지 끊임없는 개발과 발전을 거듭해온 제네바 실은 고객과 최고급 시계 애호가들이 요구하는 수준 높은 기대에 부응할 만한 차별화된 기준을 제공해왔다. 특히 2011년 설립 125주년을 기념하며 제네바 홀마크는 더욱 까다롭게 개편되었다. 기존의 제네바 실이 무브먼트만을 인증했다면, 개편된 제네바 실은 시계한 피스 전체를 검증하게 된 것이다. 더불어, 종전의 조항들이 피니싱에 포커스를 둔 조항에 가까웠다면, 새롭게 추가된 조항들은 수중 압력 저항 기능이나 파워 리저브 디스플레이 같은 기능 면에 대해서도 까다로운 검증절차를 거치게 되었다.
매년 스위스에서 생산되는 약 2천만 개의 시계 중 2만 4천 개만이 제네바 품질 보증 마크를 획득한다. 로저 드뷔는 브랜드에서 생산하는 모든 시계가 제네바 인증을 받고 있으며, 바쉐론 콘스탄틴도 거의 모든 제품에 제네바 인증이 따른다. 까르띠에의 경우 제네바에 별도의 워크숍을 설립, 일부 하이엔드 모델에서 제네바 인증을 받고 있다.
살아 있는 시계 박물관, 제네바
제네바를 여행한 사람들은 제네바에 대해 ‘시계가 없어도 전혀 불편하지 않은 곳, 도시 어디를 가더라도 시간을 알 수 있는 곳’이라고 말한다. 실제 제네바 곳곳에는 각 시계 브랜드에서 제작한 벽시계가 거리 곳곳에 자리해 있다. 고급 레스토랑 한켠에 자리 잡은 벽시계 또한 위블로, 브레게, 롤렉스, 오메가 등 유명 시계 브랜드에서 특별하게 제작한 것이 대부분이다. 제네바 영국공원의 꽃시계도 제네바의 명물 중 하나다. 계절마다 6천 송이 이상의 꽃과 식물로 새롭게 단장하는 꽃시계는 시계산업의 메카인 제네바 도심에 위치해 있어 더욱 인상적이다.
시계 브랜드 본사부터 시계 박물관, 시계 매장 등 시계와 연관된 장소도 유난히 많다. 가장 대표적인 곳이 바쉐론 콘스탄틴 부티크와 파텍 필립 뮤지엄이다. 바쉐론 콘스탄틴의 장 마크 바쉐론이 공방을 설립한 생 제르베(St. Gervais) 지역은 스위스 시계 장인들의 공방이 밀집해 있던 곳이다. 바쉐론 콘스탄틴은 1875년 케 드릴(Quai de L’ile)로 공방과 부티크를 이전했는데, 140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바쉐론 콘스탄틴의 공방과 부티크가 이곳에 위치해 있다.
파텍 필립 뮤지엄은 제네바 대학과 바스티옹 공원 인근에 있는데 바스티옹 공원은 칼뱅의 종교개혁비가 있는 곳이다. 시계 애호가가 아니더라도 제네바를 여행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파텍 필립 뮤지엄을 필수 코스로 방문한다. 이곳에는 파텍 필립의 역사적인 타임피스뿐 아니라 다양한 앤티크 워치가 4개 층에 걸쳐 전시되어 있다. 사람들이 제네바를 찾는 이유는 다양하다. 유럽 여행 중 중간 기착지로 들를 수도 있고, 비밀 계좌 개설을 위해서일 수도 있다. 칼뱅의 종교개혁 현장을 보기 위해, 또 유엔본부 같은 국제기구를 보기 위해 제네바에 방문할 수 있다. 제네바를 방문하는 이유야 어찌됐든 그곳에서 파텍 필립 뮤지엄을 관람하고, 140년이 넘은 바쉐론 콘스탄틴 부티크를 방문하고, 제네바 거리 곳곳에 즐비한 시계 브랜드 간판과 부티크 등을 보고 있노라면 누구라도 시계의 매력에 빠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