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그쳤다. 새벽녘까지 세차게 내리던 비가 아침 9시가 넘어가자 그치고 햇살이 거실 창문을 넘어 들어온다. 하던 일을 서둘러 마무리하고 아파트 옥상에 마련해 둔 텃밭으로 갔다. 이름하여 ‘다향농장(茶香農場)“이다. 텃밭에 사는 것들이 앞다투어 어젯밤 비에 먼지 낀 얼굴을 씻고 햇살에 반짝이며 반긴다. 천천히 둘러보며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머문다. 사과의 일종인 알프스오토매가 하룻밤 사이에 몰라보게 자라있고 열무와 얼갈이배추는 오늘 김치를 담가야 할 만큼 자랐다. 아무래도 오늘 낼 김치를 담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부추텃밭상자를 지나 꽃이 한창인 대파텃밭상자에 발길이 머문다. 어쩌지 저 녀석들을 다 꽃을 피우게 둬야 하나, 아님 몇 대만 남기고 그냥 싹둑 잘라줄까 잠시 망설이다가 '그래 너희도 꽃은 피워야지' 싶어 그대로 돌아선다. 화분 네 개에 심어놓은 감자 싹들이 제법 자라 소담스럽다. 흐뭇하게 바라보는데 어느 틈에 싹을 틔우고 자랐는지 잡풀이 눈에 들어온다. 분명 어제도 그제도 뽑았는데 비가 내린 바람에 마음 놓고 자랐나 보다. 손이 그 잡풀을 잽싸게 뽑아 버린다. 그 옆에 그 옆에 자라난 잡풀까지.
뽑혀 내동댕이쳐진 잡풀의 연한 잎이 참 잘 생겼다 싶어 찬찬히 들여다본다. 긴 타원형의 잎이 어긋나있는데 네 개의 잎이 서로 몰려 붙어 있다. 어쩐지 그 잡풀에 자꾸 눈이 간다. 손에 집어 들고 다시 들여다본다. 다시 봐도 예쁘다. 그런데 어디선가 은은한 더덕향기가 코를 찌른다. 둘러봐도 더덕 향기가 날만한 것이 없다.
잡풀의 뿌리에 자연스럽게 눈길이 멈춘다. 여기서 나는가 싶어 코끝에 대고 냄새를 맡는다. 분명 더덕 향기다. 그 작은 뿌리에서 진한 더덕 향기가 뿜어져 나온다.‘ 이게 더덕이라고......’ 그러고 보니 비록 어린아이 새끼손가락만한 뿌리지만 제법 더덕의 몸매를 갖추고 있다. 그랬다. 그건 더덕이었다. 아뿔싸, 얼마 전에 심어놓고 까맣게 잊어버린 더덕이다.
사월 초였다. 엘리베이터 속에서 아래층 아줌마를 만났었다. 시골 시어머니댁에 가서 더덕을 심고 왔다고 했다. 더덕을 심다가 내 생각이 나서 몇 뿌리 가져왔는데 집에 안 계셔서 옥상텃밭에 가져다 놓았다고 하셨다. 그게 일주일 전인데 못 봤느냐고 묻는다. 후다닥 옥상텃밭에 올라갔더니 붕어빵 봉지만 한 봉투에 더덕 이십여 뿌리가 담겨 있었다. 뜨거운 옥상 햇살 속에서 일주일이나 지났으니 마를 대로 말라 꾸덕꾸덕 말라가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 잠시 망설이다가 그냥 심어보기로 했다. 싹이 날 리가 만무겠지만 그냥 버리기엔 어쩐지 서운했다.
잊었다. 까맣게 잊은 더덕이 살아나 싹을 틔운 것이다. 서툴러도 한참 서툰 얼치기 농사꾼 눈에 잡풀로 오해를 산 더덕이 얼마나 억울했을까 싶다. 서둘러 다시 주워들고 어디다 심을까 잠시 옥상텃밭을 둘러본다. 작년 겨울 추위에 얼어 죽은 포도나무 화분이 눈에 들어온다. 그 화분이라면 안성맞춤이다.
더덕이 자라 덩굴손을 뻗으면 죽은 포도나무 가지를 붙잡고 자라면 될 테니까. 조심스럽게 더덕을 옮겨 심고 물을 주었다. 더덕을 심어놓은 화분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얼치기 농사꾼 손에 자라야 하는 더덕이 들여다볼수록 안쓰럽다. 한동안 축 처져서 살아갈 테지만 더덕의 끈질긴 생명력이라면 잘 버텨줄 것이다. 이런 끈질긴 생명력을 주신 신이 오늘은 한없이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