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06.03 01:27

“나폴레옹은 단 6일만 ○○했다. 헬렌 켈러는 하루도 ○○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똑같은 단어가 들어가는 ○○은 무엇일까요?”

이런 퀴즈가 나온다면 금방 맞추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한 사람은 전쟁 영웅으로 프랑스 황제에 오른 삶을, 다른 한 사람은 눈과 귀와 혀를 잃어버린 삶을 살았으니 말이다. ○○의 답이 ‘행복’임을 알게 된 연후에는 의아해질 수도 있다. 스스로 왕관을 썼던 그는 단 6일만 행복했고,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삼중고를 겪었던 그녀는 하루도 행복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니 그렇다.

“복 많이 받으세요!” 벌써 반이 지나려 하지만 올해가 시작됐을 때 가장 빈번히 주고받은 인사였을 것이다. 모두 한 해 내내 행복을 기원하는 마음에서였다. 매년 판에 박은 되풀이인 듯싶어 아무리 다른 궁리를 해봐도 해가 바뀔 때 이보다 더 좋은 인사가 떠오르지 않는다. 행복한 한 해 한 해가 이어져 행복한 인생으로 ‘해피엔딩’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 까닭이다. 비록 어쩔 수 없는 역경에 처하게 될지라도 헬렌 켈러처럼 매일 행복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어떻게 살아야 그럴 수 있는지, 이미 행복 담론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넘쳐난다.


‘버킷리스트’ 1, 2위

최인철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이자 행복연구센터장은 “행복하려면 여행을 자주 가라”고 권했다. “단일한 행동으로 가장 행복감을 주는 게 여행”이란 이유에서다. 그는 한 인문학 강의에서 “몸의 3대 영양소가 탄수화물과 단백질, 지방이듯 마음에는 자유로움과 유능 감, 관계가 필수적”이라고 꼽았다. “무엇보다 자유로움, 바로 ‘벗어나는 경험’을 주기 때문에 여행은 상당한 행복감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걷기, 놀기, 말하기, 먹기 등이 한데 어우러진 여행이야말로 ‘행복종합선물세트’요, ‘행복 뷔페’란 얘기다.

▲일본 여행에서 자주 보았던 복을 부르는 고양이.
▲일본 여행에서 자주 보았던 복을 부르는 고양이.

그런데도 여행은 삶을 돌아볼 때 후회스럽다는 항목들 가운데 늘 윗자리를 차지하곤 한다. 얼마 전 삼성생명 은퇴연구소가 은퇴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만도 노후 여가 자금을 마련하지 못한 것, 하고 싶은 여행을 마음껏 하지 못한 것이 은퇴 전 준비해 놓지 못해 가장 후회되는 일들로 나타났다. 그래서인지 죽기 전 해보고 싶은 일의 목록인 ‘버킷리스트’에서 언제나 1, 2위 안에 드는 것도 여행이다. 문제는 이를 위한 돈과 시간이다. 하지만 여행을 삶의 우선순위에 둔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지적에는 고개를 끄떡일 수밖에 없다.

두 다리가 성해서 돌아다닐 수 있을 때, 어떻게든 그 가능성을 살리려는 이들을 주변에서 적잖이 본다. 내가 참석하고 있는 평생교육강좌에서만도 여행 성수기를 전후해 빈자리들이 부쩍 늘어난다. 경제가 어렵다지만 비수기를 활용해 저렴하게 여행을 떠난 이들의 자리다. 하루라도 젊은 지금은 좀 먼 데를, 앞으로 늙어가면서는 점점 가까운 데를 가자는 나름의 여행거리 기준에 따라 해외여행이 대세다. 국내는 고속철 덕에 거의 당일로 가능하게 된 데다, 근래 들어 강세인 원화 가치가 발길을 더욱 외국으로 잡아끄는 것 같다.

하기야 2013년 해외 출국자만 해도 이미 1,350만 명에 달했다지 않는가. 국내 대표적인 여행사의 대표는 머잖아 우리 소득수준이 3만 달러가 넘고, 4만에서 5만 달러에 이르면 전 국민이 연간 한 번은 해외여행을 가는 시대가 오리라 예견한 바 있다. 해외여행이 이벤트가 아니라 일상인 시대가 되리란 전망이다. 해외에서 쓰는 돈도 엄청나게 늘어나서 인구나 경제규모, 국민소득이 우리보다 월등히 많은 일본에 견줘 큰 차이가 없는 수준으로 치닫는 중이다. 동시에 국가적으로는 수년째 관광수지 적자가 우려되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다.


인생을 바꾸기도 하는 여행

그런데 개인적으로 보다 돌아봐야 할 점은 어디를 가든 간에 ‘여행자’냐, 아니면 ‘관광객’이냐가 아닐까 싶다. 관광(觀光)은 문자 그대로 ‘빛을 본다’로, 소위 ‘삐까뻔쩍한’ 볼거리 위주로 다닌다는 뜻을 품고 있다. 그래서 이문재 시인은 “여행이 온몸으로 하는 것이라면 관광은 두 눈으로 한다. 여행자가 현지인에게 반가운 손님이라면 관광객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소비자일 따름”이라고 보았다. 소설가 마르셀 푸르스트의 “진정 깨달음을 얻는 여행은 새로운 경치를 찾아가는 데 있지 않고 새로운 눈을 갖는 데 있다”도 같은 맥락의 말이다.

관광객이 아닌 여행자가 되면 관광수지 적자가 조금은 덜어지려나. 어차피 우리 삶 자체가 잠시 세상을 다녀가는 여행이니, 여행자로서 짐을 가벼이 간소하게 살라고 현인들은 설파해 왔다. 앞서 최 교수 또한 “소유물을 늘리는 데가 아닌, 경험을 늘리는 데 돈을 쓰라”면서 “행복은 경험의 풍성함에 따른다”고 강조했다. 두고두고 다양한 이야깃거리들을 만들어낼 경험이 충만한 여행이야말로 행복과 직결될 수 있는 셈이다. 그리하여 어떤 여행 경험은 우리의 인생을 바꾸기도 한다. 좋은 옷이나 비싼 자동차를 구매하는 것으로는 어림없는 일이다.  

국내외로 안 가본 곳이 없을 만큼 여행을 즐겨온 한 지인은 여행이 곧 행복이라는데 썩 동의하지는 않는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여행이 우선 피곤으로 다가오고, 즐거움은 일시적이며, 함께하는 이들과도 내내 관계가 좋으리란 법은 없다는 반론이다. 그럼에도 여행에는 아무리 편안한 집과 살가운 가족이더라도 한 번쯤은 거기서 벗어나 누리고픈 자유로움이 넘친다. 피곤하고 일시적일지언정 즐거운 경험들이 주는 마력적 행복이 출렁인다. 그렇지만 여행이 끝난 후 다시금 돌아갈 집과 함께할 이들이 없다면 과연 그 행복이 가능할까.

여행이 곧 행복은 아닐지 몰라도 행복의 촉매제임은 분명하다. 이 아름다운 계절이 다 가기 전에 ‘벗어나고파’ ‘돌아가고파’가 어우러지는 여행에 삶의 우선순위를 둬봄 직하다.

조선일보 조선닷컴

시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