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06.04 10:05

살아있다는 것은 꿈을 꿀 수 있다는 것이다. 꿈을 꾼다는 것은 아직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게도 꿈이 있다. 흔히들 말하는 나의 버킷리스트에 생각날 때마다 하나하나 적어 내려간 꿈들이 있다. 언젠가는 내가 일선에서 물러나면 해야지 하던 것들이다. 가만히 그 버킷리스트를 들여다보면 말도 안 되는 꿈이 있는가 하면 마음먹는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실천할 수 있는 꿈들도 있다.

평생을 다닐 것만 같은 직장을 떠난 지 두 달이 흘렀다. 그래도 버킷리스트엔 무지갯빛 내 꿈들이 들어 앉아 나오지를 못했다. 제일 먼저 하리란 ‘혼자 여행 다니기’ 꿈조차도 단 한 번도 실천하지 못했다. 낯선 도시 한가운데에서 지도를 펴들고 두리번거리는 내 꿈보다는 주변 사람들의 꿈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그들의 꿈들을 이루어 주고 싶었다. 그러니 내 버킷리스트 속의 꿈들은 늘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혼자 여행 다니기’나 하다못해 ‘일주일에 한 번 혼자 영화 보기’ 같은 하잘것 없는 꿈도 아직이다. 선뜻 나서지 못하는 나약함도 있지만, 문제는 돈이 든다. 수입은 줄었고 평생 쓰지 않았던 가계부도 요즘 쓰고 있다. 좋게 말하면 이제 철이 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만큼 삶이 팍팍해졌다는 이야기다. 자칫 잘못하면 빚질까 봐 노심초사하는 요즘이다. 일 막에서의 삶이 너무 방만하게 주먹구구식이었기에 조이고 또 조이는 중이다.

봄 햇살이 거실에 노닐고 있는 한낮, 하도 무료하여 집에 들어온 구청소식지를 뒤적이다가 맨 마지막 조그맣게 게재된 광고 하나를 발견했다. 눈이 번쩍 뜨인다. 연극반 모집이다. 연극이라니 안 그래도 연극동아리를 찾고 있었는데 거기다 무료라니 이게 웬 횡재인가 싶다. 서둘러 전화 신청을 했다. 열다섯 명 모집에 열다섯 번째라고 한다. 신청을 하고 손꼽아 개강일을 기다렸다.

그리고 수요일. 드디어 개강일이다. 아침부터 부지런을 떨고 개강식에 참석했다. 서울시에서 하는 ‘거꾸로 가는 꿈의 극장’이라는 제목의 테마 중 노래극을 만들고 공연하는 동아리 활동이었다. ‘이런 이런 노래라니….’ 난 노래라면 음치요, 춤이라면 몸치다. 그냥 연극반인 줄 알았는데 음치에다 몸치인 내가 해야 하는 것들이 노래극이란다. 멋지게 말하면 뮤지컬쯤 되는 모양이다. 산 넘어 산일 것 같은 느낌에 잠시 안절부절못했다.

뻔뻔해지기로 했다. 무슨 전문 극단도 아니고 오디션을 보는 것도 아니고 소일거리로 하는 건데 이 나이에 뭐 어때 하는 배짱이 가슴 밑바닥부터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그래 해보는 거야. 하지 않은 것을 하는 것, 내가 걸어오지 않은 길을 가는 것. 이 동아리의 목적이 나를 찾아가는 건데 나를 찾아가는 거야. 천상병 씨가 말했다. "인생은 소풍이다." 소풍 나온 건데 뭐 까짓것 한번 해보는 거야. 누군 뱃속부터 배우고 나온 것도 아닌데….

누구나 다 알고 부른다는 노래, 그래도 나만 잘 모르고 부르지 못하는 노래 ‘섬마을 선생님’이 첫 수업으로 흘러나온다. 순간 또다시 당황스럽다. 그토록 배우려다 배우지 못한 노래가 ‘섬마을 선생님’이다. 이 노래를 부르려면 소위 말하는 삑사리가 어김없이 튀어나오는데 처음부터 난관이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노래 선생님이 남자다. 남자 음이라면 그런대로 쫓아 갈 수 있다. 그래도 삑사리가 나올까 봐 최대한 낮추어 부른다. 그렇게 노래가 입에 붙는가 싶었는데 이번엔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춘다. 현대무용과 고전무용 그 중간쯤 되는 춤이다. 에라, 모르겠다, 망가지기 밖에 더하겠는가 싶어 신나게 흔들었다.

이 수업의 기본 줄기는 트로트 노래로 나를 찾아가는 수업이란다. 노래 속에 내 생각을 집어넣어 가사를 재구성하여 부르고 춤을 만들고 연극을 하는 것이라 한다. 잠시 일상에서 비켜나 나를 찾아 꿈속으로 들어가는 시간이다. 누구는 성우가 꿈이었고 누구는 배우가 꿈이었단다. 못 이룬 꿈을 늦게나마 해보고 싶어 하나둘 모인 사람들이다.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느라 잊어버린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그 여행 속에 푹 빠져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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