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만드니까 쉽게 보는 것… 열정적인 책은 버릴 수 없죠"

2일 출간된 소설가 강병융의 에세이 '아내를 닮은 도시'(난다)는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가 무대다. 류블랴나 대학에서 한국 문학을 가르치는 작가가 유럽 한가운데 숨은 이 작은 도시를 소개했다. 흥미로운 건 이 책의 표지. 슬쩍 꺼내 펼치면 마법처럼 신문 크기의 대형 지도로 '변신'한다. 보드닉 중앙시장, 프란체스코 교회, 국립 도서관 등 류블랴나의 명소(名所)가 촘촘하게 박혀 있다. 말 그대로 걷고 싶게 만드는 책. 출판사 난다의 '걸어본다' 시리즈 제 4권이다. 1권인 문학평론가 이광호의 '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 2권인 소설가 강석경의 '이 고도(古都)를 사랑한다', 3권인 갤러리 토마스파크 대표 박상미의 '나의 사적인 도시'의 표지도 널찍이 펴면 하나같이 용산, 경주, 그리고 뉴욕의 지도로 탈바꿈한다.

책을 읽지 않는 시대, 아니 읽어도 일회용처럼 소비하는 시대. 이 시류를 거슬러 '절대로 버릴 수 없는 책'을 만들겠다고 선언한 출판사들이 있다. 한 번 읽고 내팽개치는 책이 아니라, 보물처럼 품고 반복해서 보는 책. '걸어본다' 시리즈를 펴낸 난다 김민정 대표는 "쉽게 만들면 쉽게 보는 것 같다"면서 "책을 하나의 물성(物性)으로, 집에 간직하는 예술로 삼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했다.

출판사 스윙밴드의 페이퍼 패션(paper passion) 시리즈도 책을 끝까지 함께 갈 친구로 우정을 맺게 하는 또 하나의 사례다. 건축가 문훈의 '달로 가는 제멋대로 펜'과 화가 문성식의 '굴과 아이'가 지난해와 올해 이 시리즈로 출간됐다. 페이퍼 패션은 샤넬의 수석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가 출판 예술가라 불리는 게르하르트 슈타이들(Steidl)에게 바친 동명(同名)의 향수 이름에서 따온 것.

문훈의 '달로 가는 제멋대로 펜'은 책이 아니라 3단 변신하는 합체 로봇 같다. 새빨간 표지를 펼치면 엄마 품 안의 어린 남매 같은 두 권의 작은 책이 튀어나온다. 한 권은 몰스킨 다이어리 같은 드로잉 노트, 또 한 권은 다소곳한 텍스트 노트다. '달로…'는 지난해 베네치아 비엔날레에 초대받았고, 이 여정에서 이수은 대표는 슈타이들을 만났다. 그는 한국의 제본기술을 칭찬하면서 "당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포기하지 말고 계속하라"고 응원했다. 이 대표는 "독자들에게 종이책의 다양한 매력을 경험하게 하고 싶다"면서 "제작비는 다른 책보다 압도적으로 높지만 비주얼 요소가 강한 만큼 해외 진출을 꾀하기에도 유리하다"고 했다.

이런 출판사들의 모태(母胎)격은 수류산방(樹流山房)이다. 난다의 김민정 대표는 "디자인 혁신의 최고봉이자 장인"이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수류산방은 "잘 만들어진 책과 그 책을 읽는 경험은 단순한 활자의 총합을 넘는다"고 믿는 박상일 방장과 심세중 실장이 의기투합해 2003년 12월 시작했다. 디자인의 창의성도 놀랍지만, '수류산방'의 150여종 출간 리스트에는 번역서가 한 권도 없다. 이 출판사의 목표는 각 분야 최고의 전문가들이 자신의 지식과 쌓은 경험을 책으로 남기게 하자는 것. 국립예술자료원과 함께 만든 근현대 예술가들의 구술 생애사(박용구 전혁림 장민호 장기인 등), 박수근 탄생 100주년 기념 '새로 보는 박수근, 박수근 100장면' 등이 그 한 사례다. 문제는 비즈니스보다 아름답고 의미 있는 책을 우선하다 보니, 늘 회계 장부가 빨간색이 되기 일쑤라는 것.

보다 못한 열혈 독자들이 지난해 '수류산방을 사랑하는 이들의 모임'을 결성하고 이들의 밀린 인쇄비와 종이 값을 대신 내준 적도 있다. 동인문학상 종신 심사위원인 김인환 고려대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황현산, 시인 이원, 사진가 이한구, 건축가 조성룡, 글 쓰는 요리사 박찬일 등 15명이다.

두 사람은 창업 10년이 넘은 지금도 "멍청하게 보일 만큼 몸과 마음과 시간을 책 만드는 데 쓴다"고 했다. 아무리 예술도 중요하지만, 출판도 현실에서는 비즈니스인데 이런 제작 방식은 시대착오 아닐까. 창업 동기인 둘은 웃으며 "책은 단순히 상품이 아니라, 우리의 짧은 생애를 구성하는 일부라고 믿는다"면서 "내 삶이니까, 지겹고 곤혹스럽더라도 되는대로 대충 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쉽게 만든 책은 쉽게 버릴 수도 있겠지만, 분신(分身)이야 어찌 감히 버리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