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산선문의 여덟 번째 이야기는 봉림산문이다. 봉림산파의 중심사찰 봉림사(鳳林寺) 터는 지금껏 알아본 구산선문 중 성주산문, 사굴산문과 마찬가지로 현재 절집은 남아있지 않고 폐사지만 남겨져 있는데 성주산, 사굴산은 발굴이 어느 정도 이루어져 남아있는 석조유물들이 가지런히 정리되고 복원, 수습되어 답사객들을 맞고 있는 형편이지만 봉림사지는 야트막한 산속 한가운데 찾는 이 없이 그야말로 잡초만 무성한 폐사지이다.
봉림산문(鳳林山門) 봉림산(鳳林山) 봉림사(鳳林寺)
봉림사 폐사지는 경남 창원시 봉림동 176번지로 창원시 시내 중심부 가까이에 있었다. 다행히 내비게이션에 잡힌다. 창원시는 1970년대부터 공업단지로 개발되기 시작한 신시가지로 그 옆에 있는 마산이나 창원보다는 역사와 전통이 한참 못 미치지만, 그전부터 이곳 주민들은 마·창·진(마산, 창원, 진해)이라고 하여 하나의 생활권처럼 지내오다가 지난 2010년 마침내 창원시로 통합되어 경남도청의 소재지이자 인구 100만이 넘는 대도시가 되어 현재 광역시로의 승격을 추진하고 있다.
이렇게 문화유적과는 조금 거리가 먼 듯한 대규모 기계공업단지 창원의 중심지에서 멀지 않은 곳 봉림동, 창원 골프장 바로 옆, 아파트 단지 옆으로 난 산길을 따라 1Km 이상 꼬불꼬불 올라가야 한다. 아파트가 끝나고 길은 막히고 좁다란 산길이 시작되는 곳에 봉림사지 표지판이 없었다면 찾기 어려운 곳이다.
절터가 위치한 봉림산은 높지는 않으나(290m) 숲이 울창한 저 산속 어딘가에 절터가 있으리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좁은 산길은 비록 시멘트 포장이기는 하였으나 교행(交行)이 어렵고 위험해 보였으며 중간 중간에 몇 채의 민가가 있어 사유지인 듯 보였다. 막바지 민가에 이르기 전에 소로로 내려서야 한다. 차량 주차하기가 매우 곤란한 지점이다.
절터의 규모로 보아 그다지 대찰(大刹)은 아니었는 듯하며, 본격적인 발굴 작업이 없어서인지 금당 터나 크고 작은 당우들의 초석, 석탑이나 석등, 각종 석물 등이 보이지 않으며 그 흔한 기왓조각도 찾기 어려웠다. 물론 풀이 우거져서 그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다행히도 봉림사 삼층석탑은 창원 시내 상북초등학교에 옮겨져 있으며, 개산조(開山祖) 진경대사의 승탑과 탑비는 원래 이곳에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 때에 경복궁으로 옮겨졌다가 지금은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에 자리 잡고 있다. 다만 이곳에 승탑과 탑비가 있었다는 표지석만이 남아있어 이곳이 봉림산문 봉림사 절터였음을 말해준다.
진경대사(眞鏡大師) 심희(審希)
봉림산문을 개창한 진경대사 심희(855~923)는 신라 말기의 승려로 속성은 김(金) 씨, 김유신의 후손으로 9살이 되던 해에 여주 고달사 원감대사 현욱을 찾아가 19살에 계를 받은 후 전국을 다니다가 김해지방 세력가 김율희를 만나 그가 시주한 절에 자리를 잡고 봉림사(鳳林寺)라 하고 선문을 여니 많은 사람이 그를 찾아 들었다. 사람들로부터 공경을 받고 국왕들을 귀의시킨 그가 923년 봉림사 선당(禪堂)에서 입적하자 왕이 ‘진경(眞鏡)’이란 시호(諡號)와 ‘보월능공(寶月凌空)’이라는 탑 명(塔名)을 내렸다.
이렇게 하여 세속 나이 칠십, 승려 나이 오십에 석가모니처럼 오른쪽으로 누워 열반에 드니 대사가 주석하던 봉림사 지에 승탑과 탑비가 있어야 하나 앞에서 얘기한대로 지금의 봉림사 지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는 황량한 숲 속에 수풀과 대나무만 무성하다. 삼층탑은 일본으로 반출하려던 일본인들이 그나마 승탑과 탑비는 서울로 옮겼다고 표지석을 세워놓아 그 자리를 찾아볼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상으로 구산선문 중 8곳을 답사하였다. 마지막 남은 곳은 수미산문 광조사인데 북한 땅 개성에 있어 답사가 어렵다. 남북관계가 개선되어 개성만이라도 답사할 수 있으면 수미산문뿐 아니라 고려의 수도 개성 주변에 어마무시한 문화재들을 샅샅이 살펴볼 수 있을 텐데 난망한 일이다. 부득이 구산선문 중 여덟 곳의 답사기로 마무리한다. 아쉽다. 다음에는 5대 적멸보궁 답사기를 준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