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중반에 들어서니, 주위에 있는 물건들에 시선이 간다. 일생을 같이 해 온 저 물건들을 이제는 정리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옷과 그릇들은 1차 정리를 마쳤다. 특히 내가 애지중지했던 것들이라도 내가 없으면 무슨 보존 가치가 있으랴! 어떤 것들은 그래도 아쉬워 자식들에게 남겼으면 하는 욕심이 나는 것도 있고, 버릴 것은 내 생전에 과감히 버려서 자식들 수고를 덜어주는 것이 그나마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우선 눈에 띄는 건 책이다. 아버지 때로부터 우리 남매들이 유난히 책을 좋아 했던 터에 꽤 많은 장서가 있다. 한 켠엔 가족 사진첩, 학교 졸업 앨범, 일기장, 족보 같은 소중한 나와 집안의 기록물들이 가지런히 보관되어 있다.
책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고 만져보고 펴 본다. 카네기의 ‘인생과 성공’ 은 학생 시절, 나의 성격이나 행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삶의 지혜서였다.
미소와 함께 당시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책도 있다. 돈이 없어 책을 못 사도 당시 서점은 자주 들리는 곳이었다. 눈에 띄는 책 제목이 들어왔다. 조병화의 ‘밤이 가면 아침이 온다’ 였다. 욕심이 생겼으나 당장 돈이 없었다. 주인에게 ‘돈을 가져 올 테니, 이 책 팔지 마세요!’ 하였다. 어이가 없던지 주인은 웃으며, ‘그냥 가져가고, 돈은 다음에 가져 와!’ 하는 게 아닌가? 순진하기만 했던 고등학생 시절, 그 때 좋았던 기분은 지금도 생생하다.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발령 전 쉴 동안, 두어 달 인근 초등학교에 나가 임시교사 및 학교업무 보조일을 보다 나올 때, 그 때 돈 5천 원을 수고비로 주는 것이었다. 아버지께서 ‘구두나 맞추어라!’ 하시는 것을 몽땅 서점에 가서 책을 샀다. 그 때 샀던 소월 시집은 지금도 여전히 내가 자주 뽑아보는 책이다.
‘은화(隱化)’는 천주교 전래 시의 군란(窘亂)소설이다. 이 책은 고향 진천지방에서의 대원군의 박해를 그린 장편소설로, 천주교인들이 소설 속 숨어살던 배티성지를 비롯한 12곳 마을이름이 현재에도 그대로 있어 실감을 더해주는 소설이다. 30여 년전, 진천 사적 조사차 천주교 성당에 취재하러 갔다가 얻어 읽어보고, 가지고 싶은 마음에 출판사에까지 직접 연락하여 소장하게 된 책이다.
어떤 책들은 문장이 세로로 쓰여져 있거나 작은 글씨고, 종이질이 좋지 않아 글씨가 펴서 잘 보이지 않는다. 지금 애착을 가진들 내 자식들이 이 책들을 볼 리도, 보관할 리도 없을 것 같다. 6,70년대 직장생활을 한 사람들은 누구나 겪었을 월부책 구입으로 책장은 더욱 풍성해졌지만 실은 별로 보아지지 않은 채 보관에 그쳐 온 것도 있다. 더구나 지금은 백과사전도 인터넷이 대신하고 있는 세상이니, 종이책의 필요성은 점점 없어지고 있는 것이다. 종이족보도 앞으론 전자족보로 대용한다고 하는 형편이다.
또 앨범, 일기장, 기념패 들은 어찌할까? 3남매의 것은 저희에게 짐을 지우면 된다지만 나의 것은 어찌할까? 책장이 있는 방에 들어갔다가 어쩌다 앨범이나 일기장을 떠들어 보게 되면 방바닥에 주저앉아 뒤적이며 옛날로 돌아가는 여행을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책들, 기념물들, 모두 두 눈 딱 감고 정리하여야 할 때다. 그래서 몇 가지 작업을 하기로 하였다. 가족사진은 따로 단일 앨범을 만들거나 스캔하여 가정 기록에 올리고, 책들 중 신앙 서적은 교회 북카페에, 교육 서적은 교사인 며느리에게 주고 나머지는 고물로 처리하기로 하였다.
특히 소중한 책들은 따로 있다. 인터넷이 있기 전부터 모아 온 글들, 논문들, 신문 스크랩 자료들, 하나하나 그 때의 상황과 함께 기억되기에 더욱 소중한 것들이다. 모아온 자료들을 복사 제본하고 지인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다. 그러한 자료들이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데에도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앨범이나 기념패는 좀 더 두었다가 폐기키로 하고, 일기장은 주요한 것들을 발췌하여 따로 기록물로 만든 후 폐기해야겠다.
기억은 한정이 있지만 기록은 무한한 것이기에 그만큼 소중하다. 세계 기록문화유산에 선정되어 최고의 가치로 전승되는 것도 그만큼 그 기록물이 존재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한글’이, 만든 이와 과정, 만든 뜻이 뚜렷이 남아 있기에 더욱 세계 문자 역사에 빛을 발하고 있는 게 아닌가?
결국 개인의 역사도 나라의 역사, 세계의 역사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아버지께서 한 지방에 오래 경찰관 생활을 하시면서 기록하신 ‘한줄 일기장’ 은 그야말로 가정의 일지일 뿐 아니라, 고장 경찰의 사건 기록이고, 역사이다.
지방에서도 개인의 기록을 중시하여 ‘1인 1책’ 이니, ‘자서전 쓰기’ 니 하여, 자기 책 쓰기를 지도 권장하고 있다. 최종적으로 자서전 한 권에 나의 온갖 기록 생애가 녹아들어가는 작업을 시작하여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자손에게 짐이 될 것들은 과감히 정리하되, 기록되어 남겨지고 전달되어야 할 것들은 챙겨 전달해 주어야겠다. ‘조상님들과 자손 들 사이에 내가 연결 고리로 살다 갔노라’ 하는 소박한 뜻 만은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