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에세이] 오디

늘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었다.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을 훌훌 털어내고 떠나고 싶었다. 나를 모르는 곳. 낯선 바람이 불고, 낯선 풍경 속에 나를 푹 담그고 싶었다. 내가 나를 풍경화 속에 담고 성당 꼭대기에 걸려있는 노을을 보며 걷고, 아침 안개가 거치지 않은 들길을 걷다가, 물길을 따라 걷고 싶었다.

가방을 싸서 떠났다. 공식적으로 치면 출장길이다. 동행은 없다. 온전히 혼자다. 내비게이션을 켜고 숙소를 찾아가는 길에 저절로 콧노래가 나온다. 차창을 활짝 열어놓으니 상큼한 바람이 내 머리 위에서 춤을 춘다. 춤을 추는 바람이나 반짝이며 팔랑이는 이파리들도 다 나를 환영하는 것 같아 마음은 하늘을 난다.

같은 방을 쓰게 될 룸메이트도 어디서 오는 누군지도 모르지만 마음은 이미 그에게 달려가 환영 인사를 보낸다. 그가 전라도 어디선가 오는 이가 될 수도 있고, 강원도 오지에서 오는 사람 일 수도 있다. 이왕이면 내 고향 강릉 사람이면 좋겠다. 욕심을 부려보지만 누구라도 좋다. 여행지에서의 낯선 이와의 만남은 그 설렘으로 충분한 것이니까.

여행지에서의 마지막 날의 아침. 동트기 전에 일어나 혼자 산책을 나섰다. 커피 자판기에서 커피 한 잔을 뽑아들고 아무도 걷지 않는 길을 천천히 나섰다. 호텔 문을 나서자 작은 마을이 정겹다. 아직 새벽 푸르름이 남아있는 이차선 도로에 뜨문뜨문 차들이 지나간다. 벚나무들이 도로를 사이에 두고 서로 손을 잡고 있었다. 마치 터널처럼 뚫려있다. 그 벚꽃 가로수 터널 속을 걷기 시작했다.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탓에 보도블록 사이에 잡풀들이 자라나 바람에 한들거린다. 그 한들거림 속에 앙증맞은 작은 민들레꽃도 보인다. 그 노란 민들레꽃에 다가가 들여다보다가 발길을 돌리려는데 무언가 시커먼 것들이 보인다. 뭘까? 버찌다. 그러고 보니 차가 다니는 도로나 보도블록 길이나 온통 떨어진 버찌로 발 디딜 틈이 없다. 나무를 올려다보니 농익은 버찌가 촘촘히 달려 있다. 저렇게 통통하고 많은 버찌를 본 적이 없다.

아련한 추억 하나가 떠오른다. 문득 올려다본 벚나무에서 버찌를 발견하곤 '무슨 맛일까?' 하는 순간 뛰어올라 버찌를 따 주었던 소년이다. 그때 그 생각이 나서일까. 버찌를 다시 한 번 먹어보고 싶다. 그때 그 맛대로 '버찌야 쓰고 텁텁할 테지 뭐 별맛이야 있겠어.' 하면서도 내 머리 위까지 늘어져 내린 벚나무 가지로 손을 뻗는다. 까맣고 통통한 버찌를 따서 입에 넣어본다. 달콤하다. 예상 밖이다. 달콤한 맛에 가던 길을 멈추고 연달아 따서 먹는다. 먹고 또 먹고 행복함에 나 혼자 씨~익 웃는다.

우리 세대의 젊은 날, 신혼 여행지로 손꼽히던 이곳 온천이 쇠락하면서 폐가로 변한 관광호텔을 막 돌아서자 밭들이 펼쳐져 있다. 옥수수가 내 키만큼 자라 바람에 흔들린다. 이제 막 심은 고구마순이 자리 잡았는지 튼실하다. 고구마순이라고 했지만 사실 자신이 없다. 어딘가 좀 다른 듯하지만 무엇이 다른지 꼭 집어낼 수가 없다. 그 건너 밭에는 하얀 꽃이 드문드문 피어있다. 다가가보지 않아도 그건 분명 감자밭이다. 그렇게 자신할 수 있는 것은 내가 감자바위인 강원도 출신이기 때문이다. 참 오랜만에 감자꽃을 본다. 혹시나 자주감자꽃이 피었을까 하여 찾아보지만 보이지 않는다. 섭섭하다.

천천히 밭둑을 걷는다. 저 멀리 추억 속 어린 소녀가 밭둑을 걷는다. 머리카락이 살풋살풋 흔들린다. 바람 냄새도 덩달아 살풋 거린다. 밭둑가에 오디나무가 서 있다. 바닥에 버찌처럼 농익은 오디가 떨어져 뒹군다. 아무도 따지 않는지 오디는 농익어 가다가 그대로 떨어지고 있었다.

옛날 내 살던 시골에서는 여러 집에서 누에를 길렀다. 그 당시 누에치기는 시골에서 유일하게 큰돈을 만질 수 있는 돈벌이였다. 그 누에가 먹는 것이 이 오디가 달리는 뽕나무였다. 그러니 뽕나무는 귀하디귀한 존재였다. 오디가 달렸다고 함부로 달려가 따 먹을 수도 없었다. 분명 누에는 뽕나무 잎만 먹는데도 오디를 못 따 먹게 한 것은 그만큼 귀한 나무였기 때문이리라.

어느 날, 동네 친구들과 놀다가 슬며시 호랑이 할아버지네 뽕나무 밭에 스며들어갔다. 뽕나무마다 지천으로 달린 오디를 신나게 따 먹었다. 손에 보랏빛 물이 흥건하도록 따 먹고는 안 먹은 척하고 입가를 손으로 쓱쓱 문지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동네 어귀에서 호랑이 할아버지와 딱 마주쳤다. 오금이 저려왔다. 다리가 지은 죄 때문에 후들거린다. 다른 때보다 더 공손히 손을 앞으로 모으고 아주 얌전하게 인사를 하는 순간 벼락이 쳤다.

"이놈들~, 누가 뽕나무밭에 들어가랬어." 안 그래도 호랑이 할아버지가 눈에 보이면 간이 콩알만 해지는데 지은 죄가 있으니 얼마나 놀랐겠는가. 멀리서라도 호랑이 할아버지가 어른거리면 멀리 돌아서 다녔던 판에 할아버지의 호통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도망을 가야 하는데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한데 당돌한 영자가 불쑥 내뱉는 말 '우린 뽕나무밭에 안 들어갔는데요. 오디 안 먹었어요.' 하고 시치미를 뗀다. 시치미 뗀다고 될 일인가. 그 쫑알거리는 입가에 물들인 보랏빛 자국이 선명한데…. 결국 영자는 자기네 집으로 호랑이 할아버지에게 질질 끌려서갔다. 잘못했다고 손바닥이 닿도록 빌면서….

오디 한 개를 따서 입에 넣어본다. 익을 대로 익은 오디 맛이 달다. 옛 맛 그대로다. 잠시 서서 오디 맛에 빠졌다. 달콤하고 새콤한 맛이 깃들여진 오디 맛에 빠질수록 손끝에 보랏빛 물이 진하게 든다. 횡재도 이런 횡재가 어디 있을까 싶다. 요즘 트렌드인 웰빙 바람에 언젠가부터 오디도 한 몫 끼어들었다. 자연히 시장에 나가면 오디를 만난다. 하지만 반가우면서도 보기만 할 뿐 선뜻 사 지지 않는다. 있으면 먹고 없으면 그만이지 사 먹을 것까지야 하는 생각이 강한 탓이다.

오디를 신나게 먹다 보니 문득 집에 있는 사람이 생각난다. 그 사람도 오디를 좋아하는데 하는 생각이 미치자 아직 다 먹지 않은 커피를 쏟아낸다.

지금 막 떠오른 햇살에 반짝이며 흐르는 개울물에 종이컵을 씻어내고 오디를 따서 담는다. 크고 실한 오디만을 골라 종이컵에 담는다. 돌아가서 오디를 쑥 내밀면 '아니, 웬 오디야?' 하고 미소를 머금을 그 사람 생각에 내 얼굴에도 미소가 떠오른다.

여행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세상을 만나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찾아 떠나는 것. 그리하여 강물이 흐르는 강가를 걷다가, 녹음 우거진 산길을 걷다가 문득 내 자리로 돌아가야 함을 느낄 때, 그때 돌아가기 위해 떠나는 것이 여행이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