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하늘이 산과 맞닿은 땅 무주. 무주의 명산인 덕유산 자락에 위치한 안성면 공정리에는 커다란 비닐하우스 한 채가 자리 잡고 있다. 익히 봐왔던 비닐하우스의 다섯 배는 족히 될 만한 크기다. 이곳이 바로 귀농인 김규생(55)씨의 일터다. 지난 2007년 도시의 잘나가던 사업을 접고 무주에 정착한 그는 이 비닐하우스에서 제2의 인생을 일구고 있다.
퇴로를 불사르고 농촌으로
귀농을 꿈꾸는 사연은 모두 제각각이다. 추억이 어린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도시에서 지친 삶을 치유하고 싶은 마음, 어떤 이는 건강을 되찾고 싶어 농촌을 찾고, 어떤 이는 자연에서 자녀들을 키우고 싶어 도시를 떠난다. 김규생씨의 사연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도시의 바쁜 삶 속에서 하루하루 소모되는 일상은 그에게 회의감을 안겨줬다.
“대전에서 주유소와 식당을 운영했어요. 둘 다 손을 놓을 수가 없는 일이에요. 작은 사고가 끊임없이 생기거든요. 매일 현금이 돌아가는 일이니 사장이 없으면 안 되고요. 그러다보니 쉴 수 있는 날은 설날과 추석뿐이었어요. 그렇게 쳇바퀴 돌 듯 살다보니 문득 ‘사는 게 뭔가’, ‘이렇게 계속 살아야 하나’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어느 날 나들이 삼아 찾아온 무주에서 그는 제2의 인생을 꿈꾸기 시작했다. “해발고도가 높은 지역에서 이렇게 시야가 훤한 땅을 보니까 마음이 탁 트이더라고요. 언젠가 여기서 살아보리라 생각하고 땅을 구입했죠.”
2년여 후, 그는 무주에 터를 잡았다. 언젠가를 기약했지만, 그 언젠가가 그토록 빨리 돌아올 줄은 스스로도 몰랐다고 한다. 그를 재촉한 것은 바로 블루베리였다. 오래전 상선 선원 경험을 통해 외국에서 블루베리를 접했던 그는 국내에서 블루베리 재배가 시작되는 것을 보고 계획을 앞당겼다. “블루베리라면 도전해볼만 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제가 잘 아는 작물이기도 하고, 마침 국내에서 블루베리 붐이 일어날 때라 판로도 충분할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대전의 블루베리농가에서 농법을 전수 받은 후 그는 번창하던 사업을 과감하게 접었다. 주위의 만류가 있을 법도 했지만 그의 결심은 확고했다. “돌아갈 곳이 있으면 어려울 때 뒤를 돌아보게 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아직 학교를 다니고 있는 자녀들과 부인은 대전에 남았다. 사업을 정리한 후 당분간 쓸 생활비를 아내에게 맡기고 무주로 들어왔다. 그의 예상대로 농사 3년차가 되기까지 수입은 변변치 않았다. 그러나 돌아갈 곳은 없었다. 그가 쳐놓은 배수의 진이 그가 농촌과 농사에 집중하고 적응할 수 있게 만든 힘이었다. 7년여가 지난 지금 그는 2,200여평의 블루베리 농장에서 안정적인 수입을 올리고 있다.
“무주의 블루베리는 고랭지의 큰 일교차에서 자라나서 당도가 높아요. 제가 재배하는 블루베리는 거의 전량 소매 직판으로 팔려나갑니다. 한번 드셔보신 분들은 매년 수확철마다 저에게 연락을 주시더라고요.”
나를 위해 쓰는 시간의 즐거움
그의 하루 일과는 새벽부터 시작된다. 해가 긴 계절에는 오전 5시부터 일어나 일을 한다. 수확철을 제외하고는 따로 사람을 쓰지도 않는다. 숨 가쁜 삶을 피해 온 도시에서 오히려 더 일에 매달려 있는 것은 아닐까?
“오늘 하루 일을 새벽 5시부터 정오까지 하기로 했다, 하면 딱 그때까지만 합니다. 사실 농촌일은 끝이 없어요. 내가 정해놓은 시간까지만 하되, 대신 그 시간에 즐겁게 일합니다. 제가 안하면 대신해줄 사람도 없잖아요.”
그는 판매를 위한 농작물 외에는 텃밭도 가꾸지 않는다. 시간을 스스로를 위해 쓰기 위해서다. 귀농인들에게 고추나 감자와 같은 관행농 작물을 권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농사를 처음 짓는 사람들이 도전하기엔 너무 고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고된 농사일을 하다보면 쉽게 질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 역시 귀농 전에는 농사를 지어본 경험이 없었다. 빈농인 부모를 두고 자랐지만, 그가 공부를 해 농촌을 벗어나길 원했던 부모님은 지게 한번 지우지 않았다. 대신 시행착오를 통해 배웠다. “밭 가는 일부터 실수투성이였어요. 계산을 잘못해서 고랑 폭이 제멋대로 되기도 했죠. 그때마다 다음에는 좀 더 나은 방법을 생각했어요. 그렇게 하면 주위 분들이 조언을 해주시고, 다시 고쳐나가는 과정을 거쳤죠. 제가 알고 있는 지식은 많을지 모르지만 그분들의 경험을 존중하지 않고서는 농촌에서 일을 배울 수가 없어요.”
스스로의 시간을 통제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그의 삶은 달라졌다. 건강을 되찾았고, 마음은 여유로워졌다. 복잡한 세상사와 멀어지고 나를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가족들과의 관계도 달라졌다. “제가 원래는 좀 윽박지르는 스타일로 아이들을 대했어요. 그런데 여기 와서 마음이 편안해지니까 아이들과도 좀 더 눈높이를 맞추고 이야기할 수 있게 되더라고요.”
새로운 작물에 도전하다
정해놓은 일과를 마치면 그는 작업복을 벗는다. 그렇다고 남은 시간에 노는 것은 아니다. 그 시간을 투자해 하는 일은 바로 새로운 작물에 대한 연구다. 지난해 군 보조를 포함해 2억여원을 투자해 첨단 자동화 비닐하우스를 지은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허니베리, 비타민나무, 초코베리 등 이름도 낯선 작물들이 그의 손을 거쳐 갔다. 1년에 두 종류의 작물에 도전해왔다는 그는 이제 나름의 원칙을 세울 정도로 내공이 생겼다.
“처음에는 남의 말을 듣고 재배를 많이 했어요. 이게 좋다, 저게 좋다 하면 심어봤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나니 이제 제 기준이 생기더라고요.” 그 기준 중 하나는 바로 생으로 팔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공을 거쳐야만 하는 작물은 판로가 막힐 경우 대체해서 팔 통로가 없다. 생으로 먹을 수 있는 작물은 가격을 낮추더라도 다른 유통경로로 판매가 가능하다. 장기보관이 필요 없으니 저장시설에 드는 비용도 줄어든다.
그가 요즘 집중하고 있는 작물은 안데스의 산삼이라 불리는 마카다. 남미의 고산지대에서 자라는 마카는 최근 건강식품으로 큰 관심을 받고 있다. 아직은 국내재배가 드물어 말리거나 분말로 수입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가 마카에 더 관심을 갖는 이유는 추가 투자비용이 적기 때문이다. “무주에 토마토 비닐하우스를 하는 농가가 많은데 대개는 토마토를 수확한 후에 그 시설을 놀릴 수밖에 없어요. 거기에 마카를 심으면, 다시 토마토를 심기 전까지 또 한번 수익을 올릴 수 있죠.”
또 하나의 시험재배 품목은 수박무다. 겉은 일반무와 같지만 자르면 붉은 속살이 드러나는 수박무는 독특한 외형과 남다른 당도로 상품성이 높은 작물이다. 올해 첫 시험재배임에도 벌써부터 대형마트에서 구매문의가 잇따르고 있다. 그는 수박무가 무주의 새로운 소득작물이 되길 기대하고 있다.
내 자리에서 지역과 나누는 삶
작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 그의 목소리에는 열정이 느껴진다. 새로운 작물 연구는 단순히 일이 아니라 취미생활과도 같아 보였다. 그가 꾸준히 새로운 작물에 도전하는 것은 수익을 올리기 위함만이 아니다. 자신이 지역에 기여할 수 있는 몫이 그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위에 꾸준히 새로운 작물을 권하고, 노하우를 원하는 이라면 누구에게라도 기꺼이 자신의 경험을 전달해주고 있다. “농촌에 오래있던 사람들은 대개 새로운 도전을 어려워해요. 하던 대로 하는 것이 익숙하니까요. 그런 분들에게 이 작물이 진짜 도움이 된다, 이 방법이 필요하다는 걸 전달하고 싶어요.”
지난해부터는 무주귀농귀촌협의회 회장의 역할도 맡고 있다. 반딧불축제 때마다 자원봉사 삼아 귀농귀촌 부스를 지켰던 것이 인연이 됐다. 그가 귀농귀촌협의회 회장으로서 강조하는 것은 바로 재능기부다. 도시에서 각자 쌓아왔던 달란트들을 농촌에서 풀어내는 것이야말로 귀농인들이 지역에 기여할 수 있는 바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음악을 하던 이들은 복지관 노인들에게 악기를 가르치고, 건축을 했던 이들은 친환경 건축 강좌를 열기도 한다.
“저는 크게 바라는 게 없어요. 단지 제 덕에 누가 잘됐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제2의 고향 무주에서 그가 세운 제2의 인생목표다. 고요한 수면에 파문을 일으키는 작은 돌멩이처럼, 그의 실험과 도전이 무주에서 일으킬 작은 파문들을 기대해본다.
귀농을 꿈꾸는 이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
"마을의 관심사가 되는 걸 두려워하지 마세요”
도시에 기반을 남겨두지 말라는 것과 더불어 그가 귀농인에게 주는 조언은 어울려 사는 일의 어려움에 대한 것이다. 농촌마을은 익숙한 사람들과 익숙한 일상으로 굴러간다. 이들에게 귀농인은 그 존재 자체가 화제 거리다. 취침시간과 기상시간부터, 드나드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귀농인의 일상은 마을사람들의 가장 큰 관심사가 된다. 그러다보면 때로는 오해가 생기고 뜬소문이 돌 수도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함께 보내는 시간 속에서 쌓이는 신뢰다. 낯선 이방인에서 마을공동체의 일원이 되기까지, 마을 화제의 중심이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먼저 한걸음 다가가 인사를 건네는 적극성이 그 시간을 줄여줄 수 있을 것이다.
자료제공·전라북도 귀농귀촌 지원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