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쏟아지는 버스 정류장에 서서 친구를 기다린다. 곧 도착하겠다는 친구는 올 기미가 없고 비도 그칠 기미가 없다. 건너편 노래방은 문이 닫혀있다. 노래방 영업을 중단한 모양이다. 하긴 이 밤, 그것도 우중(雨中)에 누가 올까? 사이키 조명도 꺼졌을 테고, 찰찰 거리던 탬버린 소리도 사라졌으니 노랫소리 또한 들리지 않을 터이다.
한때 회식이 끝나면 꼭 들려야 하는 곳이 노래방이었다. 그동안 짓눌린 그리움이나, 미움, 분노 이런 것들을 목청껏 쏟아냈으니 집단 해우소였다. 머리 위에서 어깨 위에서 때로는 신명 나게, 때로는 애절하게 춤추던 음표들이, 우르르 몰려나오는 순간 끝도 없는 허공 속으로 흩어졌을 것이다.
유년 시절 성당의 종소리가 생각난다. 삼종 기도에 맞추어 종지기가 치던 엄숙하면서도 은은한 종소리가 한때는 내 안의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그 종소리 중에서도 저녁 종소리는 더 길게 더 아련하게 울려 퍼지다 다시 종탑 속으로 사라져 갔다가 다음 날 새벽이면 어김없이 다시 울렸다. 가끔은 그 종소리가 꼽추가 치는 노트르담의 성당에 닿게 되리라는 엉뚱한 상상을 해 보기도 했다.
강릉! 이름만 들어도 바다 냄새가 날 것 같은 내 고향에 갈 일이 있어 어렸을 때의 그 성당을 물어물어 찾아갔다.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사십 년 후에 찾은 성당을 물어물어 찾기에도 참 힘이 들었다. 다행히 고향 성당은 뾰족한 종탑과 지붕 장식, 첨두형 아치 창호와 성당문 등이 고풍스러운 자태 그대로 유수한 역사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하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건물 전체를 한 바퀴 둘러보다가 성당 안으로 들어서니 빛을 받은 스테인드글라스가 내부를 오묘한 색채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성당 옆면과 뒷면 전체를 장식하고 있는 성화(聖畵)를 통하여 들어오는 빛은 예나 지금이나 오묘하고 신비로운 빛으로 나를 사로잡았다. 하지만 기다리고 있던 종소리는 더는 들을 수 없었다. 그때 그 종치기가 치던 장중하고도 아련한 종소리는 어딜 갔을까? 노트르담에 가 있을까?
하긴 사라진 것이 어디 그 성당의 종소리뿐이랴. 한때 그렇게 목청껏 불렀던 노랫소리나, 매일 같이 얼굴 맞대고 재잘거리던 얼굴들, 딸 바보였던 울 아버지, 사월이면 하늘거리며 교정(校庭)에 내리던 꽃비며 코스모스가 한들거리는 철길을 걷던 첫사랑, 처마 밑에 살림 차렸던 제비들, 생각해보면 손가락으로 셀 수 없는 수많은 것들이 떠나갔는데 그것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는 여름밤. 밤비 따라 흘러가니 저 깊숙한 곳에서 홀연히 다가오는 첫사랑. 말없이 웃으며 반기는 아버지의 주름살 가득한 얼굴, 사라진 것들이 내 마음 어딘가에서 머물다가 슬며시 나타나 내 입가에 미소를 머물게 한다. 그러고 보니 내 마음속 깊은 곳에 끝이 보이지 않는 블랙홀이 하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