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본디 고요해야 한다. 창밖에 야식 배달 오토바이의 굉음이 왼편에서 오른쪽으로 튕겨 나간다. 바로 이어 반대편으로 다른 오토바이가 배기음을 골목길에 뿌린다. 초저녁에 뜬 달이 굴러가듯 야식 오토바이는 늦은 밤이나 새벽에도 흔들림 없이 굉음을 내며 질주한다. 습도가 높으면 귀는 빙의된 것 같이 소음을 더 심하게 앓는다.
야식 배달오토바이의 저음은 뼈를 흐른다. 삼 년 전 이명을 한 달가량 겪었다. 이명은 저음과 굉음에 쉬는 게 참 어렵다. 상대가 남성이면 성대 울림소리는 고통이다. 배기량을 떠나 오토바이의 소음도 마찬가지다. 눈이 나쁘면 분해능(分解能:접근한 두 점이나 선을 분별하는 능력. 분리능이라고도 한다)이 떨어진 거로 끝이다. 휴식은 취할 수 있다. 청력은 뭉개지지 않고, 만화처럼 진동이 신축하는 고무줄 같다. 하나의 물체가 둘 셋 넷 식으로 울린다.
밤의 고요는 선진국에서 찾아보기 쉽다. 미국도 주택가는 고요하다. 일본도 주택가는 쥐죽은 듯 고요해 집에 과연 사람이 살까 싶을 정도다. 평수만 넓으면 살기 좋은 거주지일까? 야식 배달 오토바이가 생업과 휴식의 중간 지대에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럴 경우라도 어쨌든 밤은 생업과 학교에서 돌아온 부모나 아이들의 고요한 휴식을 담는 공동체의 그릇이다. 그 거대한 그릇에 야식배달의 심야 운행으로 파문이 물리적으로 일듯 한다면 그건 생각을 해 볼 때다.
부아앙. 좁은 골목길이 악기의 울림통같이 울린다. 얇은 주택가의 벽면과 유리가 흔들린다. 휴식의 신성한 순간이 방해를 받는 순간이 일상처럼 재현된다. 무의식적 소음이 활갯짓을 마구 해서는 안 된다. 밤은 야시장의 활어가 아니다. 무지한 소음의 칼날로 유린당할 대상이 아니다. 아니 밤은 공용의 보석이다. 그윽한 밤의 문화를 보장받는 주택 문화를 위해 공동체의 공적 기능의 칼이 오히려 순기능을 발휘에 심야의 휴식 문화를 위해 법의 칼질을 탁탁해서 공동체를 한 단계 순기능으로 작동되게 도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