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륜이 만든 스타일, 젊음이 따라갈 수 있으랴… 패션계 올해의 色은 '실버'

팬톤 컬러 연구소는 올해의 색을 '마르살라(와인에서 따온 이름으로 팥죽과 비슷한 색)'라고 정했지만, 나는 그 선택에 반대한다. 적어도 패션계에서 올해의 색은 단연 '실버'여야 한다. 올 초에 나온 셀린느와 생로랑의 광고를 본 이들이라면 이 주장에 동의할 것이다. 셀린느는 패션 사진작가 유르겐 텔러가 찍은 작가 조안 디디온을, 생 로랑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에디 슬리먼이 찍은 가수 조니 미첼을 광고에 내세웠다. 디디온과 미첼의 나이는 각각 여든과 일흔둘이다. 하얗게 센 머리가 백금색으로 우아하게 빛난다.

돌체 앤 가바나와 더 로우도 최근 광고에 60세 이상 여성들을 등장시켰다. 탄탄하게 올라붙은 둔부와 쭉 뻗은 구릿빛 다리를 훤히 드러낸 모델들이 득실대던 돌체 앤 가바나의 광고에 수줍은 웃음을 짓고 있는, 순박한 할머니가 세 명이나 등장하다니! 패션 하우스들의 이런 대담한 움직임이 실버 세대의 지갑만을 겨냥한 것은 아니다. 이 광고에 나온 여자들은 나이보다 젊어 보이지도 않고, 그렇게 보이려 노력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백발과 주름을 그냥 거기에 툭, 던져 놓는다. 이것은 세일즈나 마케팅이 아니라 메시지에 더 가깝다. 50년대에 패션잡지 보그 미국판에서 피처에디터로 활동을 시작해, 현시대 최고의 글쟁이 중 하나로 꼽히는 디디온의 사진을 한번 들여다보자. 선글라스에 가린 눈빛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패션이란 건 실용적이고 우아하면서, 위트도 있어야 합니다. 스물에나 여든에나 저는 그렇게 입어왔어요. 당신은요?"

지금 젊음은 하나의 종교이다. 이 종교에서 싱싱한 육체는 숭상을 받으며, 팽팽한 피부와 탱탱한 엉덩이는 이상(理想)이다. 킴 카다시안 같은 자가 교주(敎主)쯤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종교가 아무리 번창하고 강력해진들, 경험과 연륜이 만들어내는 스타일을 따라잡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디디온의 사진에서 우러나오는 차가운 지성과 견고한 여성성은 보톡스나 'S라인'이 아니라 세월이 만들어낸 것이다. 텔러는 피사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기로 유명한 작가다. 디디온이 그의 카메라 앞에서 주름과 흰머리를 무심하게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은 세월이 자기 편에 서 있다는 자신감 덕분일 것이다. 80년간 그는 꽤 많이 보고, 듣고, 겪었을 것이다. 디디온이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감각과 그것을 드러낼 줄 아는 태도는 그렇게 축적된 것이다. 그 세월은 젊은이가 돈 주고 사거나 책으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진작가 아리 세스 코헨은 뉴욕 거리에서 멋지게 차려입은 60~100세 행인들을 꾸준히 촬영해 그 사진을 '어드밴스트 스타일'이란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다. 블로그가 인기를 끌며 지난해 동명의 책으로 출간됐고, 이 블로그의 단골 모델이었던 여든네 살의 재클린 타야 머독은 랑방의 모델로 발탁됐다. 할머니 옷장에 오래 처박혀 있던 스웨터나 어머니가 처녀 적 입던 코트를 재활용해서 우아하고 당당한 데다 귀여운 멋을 내고 싶다면 이 책을 필히 참고해야 한다. 그렇게 완성된 패션을 어머니나 할머니와 공유해도 좋을 것이다. 옷을 입을 때만큼은 아가씨도, 아줌마도, 할머니도 없으니까. 그저 옷장 앞에 선 여자가 있을 뿐이니까.

마담 P: 다양한 해외 생활을 바탕으로 폭넓은 식견을 갖춘 칼럼니스트. 패션·음악·영화 등 대중문화와 라이프스타일 등 전방위 분야에 ‘날 선 취향’을 보여줄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