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07.03 09:51

일요일 오후 느긋하게 앉아 시인 천상병의 시를 들여다본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풍'이다. 마침 바람이 부는지 아파트 바깥벽에 붙여 놓은 풍경이 운다. 풍경소리 속에 앉아서 천천히 시를 읽어 내려간다.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후다닥! 그림자 하나가 스쳐 사라진다. 딸이 약속에 늦었다고 나간다는 인사말이 현관문 밖으로 끌려나간다. 현관문 닫는 소리가 유난히 크다. '뭣 좀 먹고 나가야지' 급하게 외치는 내 소리는 현관에서 홀로 메아리가 되어 돌아온다. 무엇이 그리 바쁜지 늘 뛰어다니는 딸이다.

‘빨리, 빨리’ 우리 모두에게 낯선 단어가 아니다. 늦잠자다 일어났을 때, 약속 시간에 늦었을 때, 밀려든 차로 앞뒤가 꽉꽉 막혔을 때, 타야 할 버스가 오지 않고 있을 때, 엘리베이터 속에서 문이 닫히는 순간이 얼마나 된다고 닫힘 버튼은 누르고 또 누른다. 너나없이 엘리베이터 속 사람들이 목을 길게 빼고 발만 동동거린다.

나도 그랬다 몇 달 전만 해도 출근길에 발을 동동거린 게 어디 한두 번이었겠는가. 이상하게 나도 늘 쫓기며 살았다. 어제오늘 처음 하는 출근길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 사십여 년을 한결같은 출근길이 늘 그 모양이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그냥 일상으로 자리매김하고 살았으니. 아침밥이야 전기밥솥이 하고 빨래야 세탁기가 한다. 시동만 걸면 달려가는 내 차도 있는데, 왜, 무엇이, 그리 바빴었는지 모르겠다.

어린 날로 돌아가 보면 하루는 참으로 길었다. 학교에 다녀와서 친구들과 고무줄놀이를 하고 소꿉놀이를 늘어지게 해도 해는 늘 하늘 중천에 한가롭게 떠 있었다. 저녁 늦게 잠이 들어도 아침에 일어나면 몸은 가뿐했고 엄마가 차려 준 밥상에 식구들이 둘러앉아 아침밥을 다 먹고 나서도 빈둥대다 학교에 가도 지각은 아니었다. 요즘처럼 시간에 쫓기지 않았다.

바빠지기 시작한 건 고등학교를 입학하고부터였다. 아침 일찍 사십여 분을 걸어가야 하는 학교는 늘 내 걸음을 빠르게 했다. 밤이 이슥해서 끝나는 학교 수업 덕분에 집으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하게 했다. 그즈음 육체노동을 기계가 대신하게 되고 컴퓨터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 그러자 세상은 무섭게 빠르게 질주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더 빠르게 더 빠르게는 분명 과속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한술 더 떠서 ‘빨리, 빨리’를 외치고 살았다. 빠르기로 치면 전 세계에서 아마도 우리가 단연 선두주자이지 싶다. 오죽하면 외국 사람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우리말이 '빨리, 빨리'일까

체코슬로바키아 출신의 밀란 쿤데라는 그의 장편 소설 ‘느림’에서 ‘과학 기술의 발전을 통해 속도감을 얻어 낸 현대인은 더 많은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한다. 더 이상 자유로운 개체로서 나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이다. 다만 나의 시간을 확보하기 위한 더 빠른 경험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더 빠르게 더 편하게 더 새롭게 가 온 세상을 휩쓸고 있다. 광풍이다. 그 속에 빠져서 우리는 허우적대며 따라간다.

퇴직하고 나니 그 속도 경쟁에서 저절로 떨어져 나왔다. 억울하고 분했다. 난 아직 젊다고 자부하는데. 속도 경쟁에서 아직은 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데. 아직 머리는 팽팽 잘 돌아가는데 왜 나를 열외로 나가라 미는지 참으로 속상하고 분했다.

세상은 공평했다. 잃었다 생각하면 얻는 것도 있는 법. 퇴직 덕분에 가끔 멈추어 내가 달려온 길을 뒤돌아본다. 지나온 길이 아득하다. 달려온 길이 어디가 시작인지 잘 보이지도 않는다. 그만큼 멀리와 있었다. 용케 광풍에 넘어지지 않고 여기까지 잘 달려왔다. 잠시 멈추어 서 있는 내 곁을 수많은 사람이 빠르게 달려간다. 어디서고 ‘천천히’란 찾아볼 수가 없다. 무조건 앞으로 나가야 하는 삶. 세상은 점점 편해지는데 모두 여유는 어디다 두고 저렇게 달리고 있을까?

[시니어 에세이] 느리게, 더 느리게

요즘은 ‘슬로우푸드’라는 말에 고개를 돌린다. 아파트 옥상에 상자텃밭을 만들고 야채는 대부분 그곳에서 길러 먹는다. 감자며 가지 오이 호박이 심심치 않게 달려 준다. ‘슬로우라이프’라는 말에 귀를 쫑긋거린다. 나를 생각하며 나답게 살자는 거다. 내 주변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내 주변 풍경 속에 나를 담그고, 별도 보고 달도 보고 살고자 한다. 길가의 곱게 핀 패랭이나 맑은 시냇물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지저귀는 새소리를 들어주려 하는 삶을 이제는 살 수 있겠다. 잃었던 것을 하나하나 찾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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