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쿨'한 독립군 입장, 관객 심장 조준 완료

지는 게임엔 베팅하지 않았고(범죄의 재구성) 아무도 믿지 않았으며(타짜) 최고 선수들을 모아 한 방을 노렸다(도둑들). 진지해지면 드라마가 무거워질까 경계하는 사람처럼 최동훈 감독은 링 위에서 날렵하게 움직였다. 펀치력보다 풋워크로 승부했달까. 오락 영화에서 그 전략은 늘 적중했다. 데뷔 후 4전 4승 무패. 흥행이라는 링에서 한 번도 엉덩방아를 찧은 적이 없다.

22일 개봉하는 영화 '암살'은 그래서 불안한 상대였다. 1930년대 독립군 이야기가 경쾌한 오락이 될 수 있을까. 그 어두운 시대로 쿨한 인물을 던져 넣어 역사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최동훈은 이런 질문에 기죽지 않았다. 화법을 바꾸지 않고 밀어붙였다. 일제강점기 경성(서울)을 이렇게 세련된 때깔과 앵글, 리듬에 담은 영화가 또 있었나. '암살'은 아무렇지도 않게 관객 마음을 훔친다.

김구가 총애하는 임시정부 경무국 대장 염석진(이정재)은 암살 작전에 투입하려고 일본에 드러나지 않은 선수 세 명을 뽑는다. 독립군 저격수 안옥윤(전지현)과 신흥무관학교 출신 속사포(조진웅), 폭탄 전문가 황덕삼(최덕문)이다. 표적은 조선 주둔군 사령관 가와구치 마모루와 친일파 강인국. 그런데 정보가 새고 누군가에게 의뢰받은 살인 청부업자 하와이 피스톨(하정우)이 암살단의 뒤를 쫓는다.

전작보다 서사는 거대해졌지만 게임 룰은 그대로다. 선수 입장, 목적이 다른 인물들, 속고 속이기, 임무 완수…. '암살'은 관객에게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진지해질 것 같으면 웃음으로 눙치고 다음 장면을 들이민다. 속도감 있게 이야기를 굴리고 공간을 창의적으로 들여다본다.

한국 영화로는 드물게 여배우가 원톱이다. 민낯의 암살단 대장 안옥윤 역을 맡은 전지현은 시원시원한 액션과 사격 솜씨, '출생의 비밀'과 내면 연기로 큰 흐름을 잡아준다. 다른 삶에 대한 동경으로 그녀가 잠깐 흔들릴 때 관객도 덩달아 꿈을 꾼다. 한국 영화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방아쇠를 당기고 허벅지에 탄창을 여럿 숨긴 여전사 캐릭터를 얻었다.

이 영화 속 인물들은 "물지 못할 거면 짖지도 말아야 한다"는 생존 논리와 "아직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는 투쟁 논리 사이에서 살아간다. 조국과 더불어 '소속'을 잃었고 살아남기 위해 본심을 감춰야 하는 세계에서 염석진과 하와이 피스톨도 흥미로운 변화를 겪는다. 어느 대목에선 둘이 일란성쌍둥이처럼 보인다. 김구가 임시정부 입법부·사법부·행정부를 소개하는 장면은 그 규모가 너무 작아서 웃음이 나온다. 모두 방 한 칸에 모여 있는데 행정부는 마침 식사 중이다.

미끈하게 잘 빠진 상업 영화다. 139분 동안 이야기가 중력처럼 관객을 잡아당긴다. 중국 상하이에서 촬영했다는 오프닝의 안개 자욱한 메타세쿼이아 길부터 180억원이라는 제작비가 말을 한다. 미쓰코시 백화점을 비롯해 미술에 꽤 공을 들였다.

이 드라마의 출구 전략은 다소 상투적이다. 하수구 탈출, 추모와 촛불, 집으로 가기 등에는 뮤지컬 '레 미제라블'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메시지도 영감(오달수)이 던지는 "어이 3000불, 우리 잊으면 안 돼" 정도로 약하다. 하지만 의욕만 앞서고 둔중한 독립군 이야기에 질린 관객이라면 이 영화의 경쾌한 풋워크에 되레 끌릴 수도 있다. 빨랫줄에 걸린 하얀 홑청들이 "대한 독립 만세!"라도 외치듯 바람에 펄럭이는 장면은 잔상이 길다. 15세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