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세에 전성기 달리는 '생명과 평화 전도사'

니혼게이자이신문 기자가 도쿄에서 가나자와(金澤)시까지 신칸센을 타고 달려갔다. 역에서 내려 택시 기사에게 "문화회관 가자"고 하자, 기사가 "또?" 하는 얼굴이 됐다. "오늘 거기 뭐 있어요? 아까부터 거기만 가네."

이날 가나자와 문화회관에서는 히노하라 시게아키(日野原重明)씨 강연회가 열렸다. 104세에 '인생 전성기'를 달리고 있는 내과 의사다.

젊어서도 유명하기는 했다. 당뇨 등을 가리켜 '생활습관병'이란 말을 만든 사람이다. 총리 주치의도 지냈다(1956~1957년). 세계내과학회 회장도 했다.

하지만 나이 들수록 스타가 됐다. 88세에 노인 운동을 시작하고, 아흔 넘어 뮤지컬을 제작하고, 100세 넘어 동화작가가 됐다. "계속해서 새로운 일에 도전하라"는 강연을 1년에 100회쯤 한다. 앞으로 3년 일정이 꽉 찼다. 도쿄·고베·오사카·후쿠이·와카야마·오키나와…. 어딜 가나 수백 석이 매진된다. 나가노 동계올림픽 경기장을 메운 적도 있다. 가나자와 강연을 들은 니혼게이자이 기자는 "팬들 열기가 록밴드 공연 수준이었다"고 썼다.

그런 히노하라씨가 20일 도쿄에서 한국 기자들과 만났다. "남은 인생, 이 친구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가겠다"며 자기보다 두 배쯤 덩치 큰 한국 테너 배재철(46)씨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배씨는 한때 성대가 망가져 목소리를 잃었다가 일본인 프로듀서 와지마 도타로(52)씨의 도움으로 재기했다. 배씨와 와지마씨의 사연이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유지태가 나오는 '더 테너―리리코 스핀토'다.

히노하라씨는 "이 친구가 콘서트하는 곳이면 어디든 가서 노래를 듣고, 둘이 함께 평화가 왜 중요한지 얘기하겠다"고 했다. 두 사람은 이미 고베 등 세 곳에서 함께 무대에 섰다. 다음 달 4일과 7일에는 오사카와 도쿄에서 '토크 콘서트'를 연다. 이렇게까지 반한 이유가 뭘까. 히노하라씨는 "2년 전 처음 만나 마음의 친구가 됐다"고 했다.

"102세 생일 때, 나가노에 사는 지인이 '좋은 노래를 들려줄 테니 꼭 오라'고 했어요. 그때 가서 들은 게 이 친구가 부르는 헨델이에요. 노래를 들으며 신의 존재를 느꼈어요. 이런 가수가 한국에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그 뒤 도쿄의 한국인 교회에서 배재철씨가 공연할 때 히노하라씨가 다시 가서 만났다. 마지막에 히노하라씨도 무대에 올라갔다. 아들보다 어린 배씨와 '아이노우타(愛の歌·사랑의 노래)'를 함께 불렀다. 히노하라씨가 아흔 즈음 작사·작곡한 노래다. 현장을 지켜본 스태프들이 "찡한 장면이었다"고 했다.

'평화'란 말은 막연하게 들린다. 히노하라씨에겐 다를지 모른다.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했을 때 그는 서른이었다. 히노하라씨의 부친은 미국에 10년 유학해 미국이 얼마나 큰 나라인지 잘 알았다. 아들과 함께 진주만 공습 뉴스를 들으며, 그는 "일본이 아무리 진주만에 있는 미국 배를 침몰시켜봤자 소용없다"고 했다.

패전 직전, 해군 소위로 징집됐지만 늑막염에 걸려 전쟁터엔 안 갔다. 대신 연합군 폭격기가 새카맣게 날아온 '도쿄 대공습'을 겪었다. 그는 "전쟁하면 안 된다"면서 "일본이 과거 한국에 좋지 않은 일을 저지른 것 역시 마음으로부터 사과하고, 앞으로 일본이 변할 거라고 표명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히노하라씨는 12년 전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생명 수업'이라는 순회 강연을 시작했다. 그가 "생명이 어디 있는 것 같니?" 하면, 아이들이 "심장에 있어요" "머리에 있어요" 한다. 그는 고개를 젓는다. "아니, 생명은 너에게 남은 시간 속에 있다. 어려선 너를 위해 시간을 써라. 하지만 자라면 남을 위해서 써라. 남을 위해 시간을 많이 쓴 사람이 천국에 간다."

히노하라씨는 "요도호 사건을 겪고 인생관이 바뀌었다"고 했다. 1970년 일본 과격 좌파인 적군파 9명이 도쿄발 후쿠오카행 일본항공 비행기를 공중 납치해 북한으로 가려고 했다. 조종사의 기지로 평양 대신 김포공항에 내렸다. 뒤늦게 안 범인들이 비행기 문을 걸어 잠갔다. 일본 정부 협상팀이 올 때까지 공포에 떨며 갇혀 있던 승객 중 하나가 59세의 히노하라씨였다. 그는 "풀려난 뒤 '목숨은 신이 주는 거로구나. 평화로운 세상을 위해 남은 시간을 바쳐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