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이 만난 사람] "우리는 '임금피크제'를 자율적으로 할 것… 정부 개입하면 될 일도 안 돼"

당·정·청(黨政靑)이 손잡고 "표를 잃을 각오로 올 하반기에는 노동개혁을 하겠다"며 칼을 뽑자, 맞은편 진영에는 노동계를 이끄는 김동만(56) 한국노총 위원장이 버티고 앉았다. 올봄에 "7부 능선까지 도달했다"는 노사정위원회의 합의를 막판에 결렬시켰던 인물이다.

요즘 그는 국회 앞에 천막을 치고 열흘 넘게 농성 중이다. 평소에도 길게 자란 머리를 본 적이 없지만, 이번에 또 삭발했다.

―김 위원장은 늘 머리를 미는 모양이다. 더운 여름에는 시원하겠지만, 세상 사람들 눈에는 '전투적'으로' 비치지 않겠나?

"IMF 때 현장 투쟁을 주도해 감옥에 갔다 온 뒤로 내게 강성 이미지가 붙었지만, 사실 '강성'과는 거리가 있다. 나는 가장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노동운동을 해왔다. 투쟁을 위한 투쟁을 한 적이 없다."

―자녀는 직장에 다니나?

"이공계를 나와 취직했다."

 

―얼마 전 대한민국청년대학생연합 등 청년 단체 회원들이 "아버지·삼촌, 임금피크제로 일자리 좀 나눠줘요"라며 시위한 적이 있다. 무슨 생각이 들었나?

"안타깝다. 청년들이 일자리가 없어 헤매고 있다. 체감 청년 실업률은 14%에 육박한다. 아예 구직을 단념한 숫자도 많이 늘었다는데…."

―한 청년 단체에서 설문 조사를 해보니 '노조가 청년 일자리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63.9%)'라고 응답했다. 좀 뜨끔하지 않나?

"청년들은 내막을 잘 몰라 그렇게 볼 수 있는데, 정부가 그런 식으로 분위기를 몰아갔다. 노동자에게 일자리 책임을 떠넘기는 식으로 말이다. 정부가 노사 간 문제인 '임금피크제'를 세대 간 일자리 갈등으로 부추기고 있다."

―노동계가 '정년 연장'만 챙기고 자신에게 손해될 '임금피크제'는 못 받아들이겠다고 하면, 청년 세대의 눈에는 '기득권 세력'으로 비칠 수밖에 없지 않겠나?

"노동계가 '임금피크제'를 안 받아줘 청년 일자리가 어려워졌다는 식으로 말하는데, 우리는 '임금피크제'를 반대하는 게 아니다. 금융기관과 대기업에서 대부분 시행하고 있다. 임금피크제와 청년 고용을 결부시키는 것은 맞지 않다."

―직장에는 자리가 한정돼 있다. 내년부터 정년이 연장돼 5년간 더 일하게 되면 신규 채용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임금피크제'를 통해 절감한 인건비로 자신들을 채용해달라는 청년들의 요구는 당연한 게 아닌가?

"올 초 노사정위원회에서 협상을 벌이는 동안 정부에서는 '근로소득 상위 10% 근로자들의 임금 5년간 동결, 미사용 연차수당에 대한 금전 보상 금지, 임금피크제 도입이 합의되면 2019년까지 98만개의 청년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는 광고를 냈다. 98만개의 일자리? 마치 임금피크제를 안 해서 청년 취업이 안 되고, 그것만 하면 해결되는 것처럼 선전한다. 이는 국민을 속이는 것이다."

―정년 연장으로 인한 인건비 증가는 신규 채용을 줄이는 상당한 이유가 된다고 본다. 기업주는 결코 자선사업가가 아니지 않은가?

"청년 고용에 '임금피크제'가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게 아니다. 하지만 정부가 선전하는 것처럼 절대적이지 않다. 청년 고용 문제는 막대한 돈(사내유보금)을 쌓아놓고 투자 않는 대기업들이나 정부의 일자리정책 실패에서 비롯된다. 그런데도 '임금피크제'만 내세워 노동자를 공격하는 식이 돼서는 안 된다."

―정부와 대기업들에 대해 비판을 하더라도, 노동계도 자신의 몫을 해야 하지 않는가?

"내가 금융노조위원장이던 2006년에 이미 은행에는 '임금피크제'를 도입했다. 55세부터는 해마다 임금의 70·50·40·40·30%씩 주는 걸로 했다. 지금도 시행 중인데 내가 욕을 엄청나게 먹고 있다. 자녀 학자금과 결혼비용 등 한창 돈이 많이 들어갈 나이인데 같은 업무를 하고서 당초 받던 봉급의 40%만 받게 됐으니 말이다."

―우리 세대에게는 임금을 덜 받는 문제이지만, 청년 세대에게는 취업을 하느냐 못 하느냐 문제다. 결국 우리 세대가 양보하는 것이 옳지 않나?

"하지만 그걸로는 기업주가 원하는 임금 삭감만 이뤄지지, 정부의 선전처럼 청년 일자리가 크게 창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근로시간을 줄여 일자리를 나누는 게 더 효과적일 것이다. 현 정부 들어 근로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창출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근로시간을 단축한 만큼 임금이 깎이면 기존 노동자들이 받아들일까?

"일선 공장에서는 대부분 시간외 노동 수당으로 임금을 채운다. 근로시간 단축에도 반대가 많다. 하지만 전체 여론 조사를 해보면 일자리 상생(相生)을 위해 감수할 수밖에 없다고 받아들인다."

―앞서 '임금피크제'에 거부하는 게 아니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한국노총은 이를 받아들이겠다'고 왜 선언하지 않는가?

"안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임금체계가 제각각인 단위사업장마다 노사 합의로 '자율적으로' 하겠다는 것이다."

―자율적으로 하겠다는 것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는 뜻인데?

"정부가 일괄적으로 밀어붙일 사안은 아니다. 그렇게 안 해도, 한국노총 산하 금융기관과 SK·KT·대한항공·한진 등은 이미 임금피크제를 하고 있다."

―자율에 맡기면 안 하는 대기업이나 공기업도 있을 것이 아닌가?

"사업장마다 임금체계 개편이 쉬운 게 아니다. 당장 내년부터 시행해서 일자리를 몇 개 만들어내라고 몰아붙이면 될 일도 안 된다. 또 노사 간 합의로 '55세부터 임금을 몇%씩 삭감한다'고 이미 합의했는데, 정부가 취업규칙을 변경해서라도 더 삭감하겠다니까 시끄러운 것이다."

―'임금피크제'를 받아들이겠다는 건지, 거부하겠다는 건지 헷갈린다.

"한국노총 산하 3600개 사업장 중에서 86%가 중소업체다. 중소업체의 경우 원래 박봉(薄俸)인데 현실적으로 임금피크제를 적용할 수 있겠나. 지난 노사정위원회에서도 '노사가 사업장 특성에 맞게 자율로 한다'고 합의했다. 그렇게 잘 되어가다가 막판에 '혹'이 붙는 바람에."

―'혹'이라니? 노동계가 막판에 틀어서 결렬되지 않았나?

"정부 측에서 '취업규칙 변경'과 '저(低)성과자 해고' 요건을 완화하는 안을 내놓았다. 사용자 임의로 임금을 삭감하고 성과 없는 직원은 자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전까지 협상에서 실업급여 수당, 원하청 불공정 거래, 납품단가 후려치기 등에서도 개선안을 마련해놓았다. 우리는 하나씩 통과시키는 쪽이었고, 정부는 이 두 가지를 넣어 합의사항을 한꺼번에 통과시키자는 '패키지 딜'을 요구했다."

―다른 합의된 것들을 모두 깨면서까지 받아들일 수 없었나?

"그걸 명시할 경우 어떻게 악용될지 모른다. 법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칼질하겠다는데 여기에 사인하면 노총위원장으로 자격이 없다."

―어떤 경우에도 합의해줄 수 없는가?

"어떤 보완책이 있는지 모르나 현 상황에서는 절대 받을 수가 없다. 독일의 노동개혁안을 만든 페티 하르츠 박사도 이걸 듣고는 '상대방을 죽일 수 있는 킬(kill) 아이템이다'고 말했다."

―현정부가 칼을 뽑은 노동개혁의 핵심 목표가 '노동시장의 유연성'이다. 한번 고용하면 내보내기가 어려워 정규직으로는 잘 안 뽑으려고 한다. 노조가 정규직을 과(過)보호해 신규 고용을 막는다는 것인데?

"지금 기업에서 직원을 못 자르는 데가 어디 있는가. 우리 조직 현실에서 일 못하는 직원이 버티고 있을 수가 있나. 물론 저항은 있겠지. 국제노총(ITUC)이 발표한 우리나라의 노동권 보호수준은 5등급으로 세계 최하위다."

―본인들은 '기득권자'로 몰려 억울할지 모르나, 노동개혁은 시대적 요구와 맞물려있다.

"노동계도 청년 일자리, 사회 양극화, 비정규직 문제를 풀려고 노력해왔다. 한국노총 산하 대기업에서는 정규직 임금의 2%를 비정규직에 돌리고 있다. 최저임금을 두 자릿수로 올려 저소득층 가계를 살리고 나쁜 일자리를 좋은 일자리로 바꿔야 한다고 했다. 오히려 정부가 그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한 것 같다. 최경환 부총리나 노동부장관도 최저임금을 1만원대로 올려야 한다고 떠들기만 했을 뿐 책임지지 않았다. 겨우 450원(8.1%) 올랐다."

―힘센 사람들이 다 떠들어도 최저임금이 6030원에 머문 것은 중소기업들이나 점주(店主)들이 현실적으로 그렇게 줄 여력밖에 없기 때문이 아닐까?

"업주들 입장에서는 부담되는 게 사실이다. 그래도 사회 양극화 해소를 위해서는 두 자릿수로 올려야 했다. 최저임금 협상 때마다 경총(經總) 등에서는 10년째 동결을 주장했다(웃음). 이번 협상에는 처음으로 비정규직과 청년 대표 두 명이 참석해 호소와 주장을 했다. 하지만 현실 앞에서 쉽지 않았다."

그는 지금은 사라진 한일은행 출신이다. 고졸 행원으로 들어갔다가 해병대에 입대했다. 복직한 뒤로 노조 운동에 뛰어들었다. 2012년 한국노총위원장 권한대행을 맡았고 작년에 위원장이 됐다. 이제 그는 농성 천막으로 갈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