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네바에서 스위스 시계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면 발레드주는 스위스 시계 산업을 키운 요람이다. 브레게, 블랑팡, 예거 르쿨트르, 오데마 피게 등 세계 최고의 하이엔드 시계 브랜드의 본사가 자리한, 스위스 시계의 요람 발레드주로 떠나본다.
스위스의 영어 이름은 우리가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스위스부터 스위철랜드(Switzerland) 등이 있다. 우리가 스위스라고 부르는 국가의 정식 이름은 스위스 연방공화국(Swiss Confederation)이다. 총 26개의 (Canton, 州)로 구성된 스위스의 주 중에는 취리히, 베른, 바젤, 루체른, 제네바 등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 말고도 여러 개가 있다. 그중 시계 애호가라면 꼭 알아야 할 주가 있다. 바로 보 주(Canton of Vaud)다.
세계적인 시계 공방이 밀집한 작은 산골 마을
스위스 서남부에 위치한 보 주는 남쪽으로는 레만 호, 북쪽으로는 뇌샤텔 호를 면하며 서쪽은 쥐라 산맥 기슭을 경계로 프랑스와 국경을 이룬다. 주도(州都)인 로잔은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본부가 있는 도시다. 그러나 시계 애호가들에게 있어 보 주에서 기억해야 할 지명은 예거 르쿨트르의 본사가 있는 르 상티에(Le Sentier)와 블랑팡, 오데마 피게, 바쉐론 콘스탄틴의 본사 또는 공장이 있는 르 브라쉬스(Le Brassus) 등이다. 보 주에 속한 르 상티에와 르 브라쉬스 같은 작은 마을을 통틀어 발레드주(Vallee de Joux)라고 부른다.
발레드주는 ‘주 계곡’이라는 뜻으로, 쥐라 산맥이 자리잡고 있는 해발 1000미터 고지대에 위치해 있다. 17세기 제네바에서 시작된 스위스 시계 산업은 곧 포화 상태에 이르렀고, 점차 그 주변 지역으로 뻗어나갔는데 가장 먼저 시계 장인들이 정착한 곳이 바로 발레드주 지역이다. 제네바 인근의 발레드주 지역에 거주하던 사람들 대부분은 농부였다. 그들은 여름에는 주로 농사를 지었지만 겨울에는 할 일이 없었다. 이곳의 겨울 날씨는 눈이 유난히 많았기에, 집 안에서 길고 긴 겨울을 보내야 했다. 바로 이러한 점이 제네바의 시계 장인들이 점차 발레드주 지역으로 이주하게 된 이유다. 하얀 눈으로 뒤덮인 산골 마을은 시계 같은 정밀 부품을 다루기에 더없이 좋은 환경이었고, 시계 제작을 위한 노동력이 풍부했기 때문이다.
제네바의 시계 장인들이 프랑스에서 이주해온 신교도들이 대부분이었다면, 발레드주에서 활동한 시계 장인들은 선대로부터 시계 제조 기술을 익힌 2세거나, 농부이자 동시에 워치메이커인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시계 제조뿐 아니라 시계에 들어가는 각종 부품을 생산하여 주로 제네바의 시계 공방에 공급하는 일도 했다.
간혹 발레드주와 쥐라 산맥을 혼동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정확하게 말하면 발레드주는 쥐라 산맥의 일부로, 보주에 속한 지역을 일컫는 것이다. 뇌샤텔 주에 속한 라쇼드퐁이나 르로클은 발레드주가 아니다. 현재 발레드주에는 블랑팡, 브레게, 오데마 피게, 예거 르쿨트르의 본사와 공장을 비롯해 파텍 필립, 바쉐론 콘스탄틴, 불가리 등의 공방이 주(Joux) 호수를 중심으로 자리해 있다. 실제 발레드주 지역을 지나다 보면 우리에게 익숙한 시계 브랜드 이름이 새겨진 건물을 쉽게 볼 수 있는데, 브랜드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이어져온 스위스 전통 가옥 형태의 공방부터 현대적으로 지은 첨단 매뉴팩처 등이 바로 그곳이다.
시계 제조 역사를 한눈에, 에스파스 오를로제 박물관
예거 르쿨트르는 발레드주를 대표하는 시계 브랜드 중 하나다. 1833년 앙투안 르쿨트르(Antoine LeCoultre)는 혹독한 추위로 유명한 스위스의 외딴 지역 발레드주의르 상티에에 자신만의 워치메이킹 공방을 설립했다. 앙투안 르쿨트르는 독자적인 공방을 설립하면서 새로운 개념을 도입했다. 당시 스위스 시계 제조업은 대부분 개별 공방으로 이루어진 가내 수공업 형태를 띠었으나 앙투안 르쿨트르는 분산되어 있던 다양한 시계 관련 장인들을 한데 모아 지금과 같은 ‘매뉴팩처’라 불리는 체계적인 워치메이킹 공방을 탄생시켰다. 예거 르쿨트르 매뉴팩처는 현재까지도 고급 시계 브랜드의 요람인 발레드주 지역에 뿌리를 내린 채, 워치메이킹에 필요한 모든 핵심 작업을 자체적으로 해결하고 있다.
오데마 피게가 시작된 곳도 바로 발레드주의 르 브라쉬스다. 르 브라쉬스의 시계 제작자 집안에서 태어난 줄스루이 오데마(Jules-Louis Audemars)와 에드워드 오귀스트 피게(Edward-Auguste Piguet)는 컴플리케이션 시계에 대해 뜻을 같이하며 1875년에 오데마 피게를 창업했다. 오데마 피게는 1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4대째 가족 기업을 이어오고 있다. 1875년 설립 당시의 건물은 현재 브랜드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는데, 처음 발레드주 지역에서 시계 제조의 역사가 시작된 18세기 타임피스부터 오데마 피게의 빈티지 피스가 전시되어 있다. 발레드주 지역에는 이 지역의 시계 제조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시계 박물관, 에스파스 오를로제(Espace Horloger)가 있다. 1996년 오픈한 박물관은 발레드주 최초의 시계 박물관으로 과거 예거 르쿨트르의 매뉴팩처 건물로 사용하던 것을 리뉴얼한 것이다. 2012년 새롭게 리노베이션해 내부 시설을 현대화했는데, 시계 조립 체험 및 시계와 관련한 다양한 가상 체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제네바를 찾는 전 세계 관광객은 많지만, 발레드주를 일부러 방문하는 사람은 웬만한 시계 애호가가 아니고서는 거의 없다. 제네바 파텍 필립 뮤지엄은 굳이 시계 애호가가 아니더라도 관광객이 방문하는 필수 코스 같은 곳이라면, 발레드주의 에스파스 오를로제는 그곳의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다.
제네바 또는 몽트뢰를 방문한다면, 반나절 정도의 일정으로 차량을 이용해 발레드주의 시계 관련 시설을 둘러보는 것은 어떨까? 평화로운 스위스의 시골 마을 곳곳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브랜드 로고를 발견하는 소소한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스위스 유명 관광 지도에는 절대 나와 있지 않지만, 예거 르쿨트르와 오데마 피게가 탄생하고 브레게와 블랑팡 본사가 있으며 파텍 필립과 바쉐론 콘스탄틴의 공장도 있는 발레드주는 시계 애호가들에게는 성지와 같은 곳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