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07.30 15:29

리뷰 | 영화 <우먼 인 골드>

리뷰 | 영화 <우먼 인 골드>

처음 그림을 본 순간 나는 여자와 남자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였다. 다만 네 개의 손이 이루고 있는 선의 흐름에 마음을 빼앗겼고 그동안의 많은 그림에서 전달받지 못하였던 색채와 터치의 강렬함에 알 수 없는 전율을 느꼈었다.

끝없이 펼쳐진 우주의 어느 공간에 달랑 남겨진 두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이 되었다. 지금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느 오래전의 시간도 아닌 또한 우리가 상상하고 있는 미래의 어느 공간도 아닌 어느 지점의 시간이 멈추어진 곳에 두 남녀가 있었다. 세상의 어느 평범한 사랑이 아닌 별이 반짝이는 우주의 어느 공간에 오로지 둘만 남겨진 처절하다는 느낌이 전달될 정도로 그 두 남녀는 어느 합일점에 도달하여 있다는 느낌을 전달하고 있었다. 이러한 느낌은 그 그림을 만났을 때의 나의 감정의 전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만 오랫동안 그 그림의 느낌이 내게 지속하고 있었다.

헐렁한 옷으로 감춰진 두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의 흐름이 불분명하다고 느꼈으나 배경이 되는 꽃밭의 황홀함과 눈을 감고 있는 여인의 표정이 어느 우주 공간에 둘만이 남겨진 간절함의 어떤 의지가 두 남녀의 손가락 선에서 표현되고 있었다.

나는 그 강렬한 그림으로 구스타프 클림트를 알게 되었다. 내 느낌을 전달받은 아들아이가 사다 준 그의 그림과 책에서 전율을 느낄 만치의 강렬한 색과 추상적인 도형으로 이루어진 그의 그림 속 세상을 만나게 되었다. 꽤 오랫동안 클림트의 ‘키스’는 나의 책장 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남자는 얼굴을 숙이고 여자는 눈을 감았다. 두 사람을 감싸고 있는 황금빛 안개는 무척이나 비밀스럽고 비현실적인 느낌을 지니고 있다. 눈을 감고 낯선 꿈의 세계를 바라보는 여자가 눈을 감았을 때 현실을 떠나 스스로가 꿈꾸고 있는 낯선 세상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클림트의 그림은 어두운 그때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 이후 알게 되었다. 그가 자주 사용하는 화려한 황금빛의 색채는 현실을 외면하고 싶은 그의 이상형의 세상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겠냐는 생각을 할 때가 있었다.

그것은 키스나 바흐어의 초상에서 나타나는 색채가 아닌 또 다른 그의 그림들에서 만나게 되는 배경 속에 숨어있는 또 다른 표현들이다. 화려함의 뒷면에 숨어있는 생의 어둠을 그림으로 풀어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할 만큼 그의 그림은 반전을 시도한다. 클림트가 그린 여성들의 꽤 많은 초상화가 지니고 있는 이중적인 표현법이다.

Gustav Klimt (1862~1918년) 는 1862년 7월 14일 오스트리아 빈 교회의 바움가르텐에서 태어났다. 빈에서 활동할 당시 유행했던 아르 누보와 상징주의의 영향을 받아 독특하고 강렬한 색채와 인체의 선으로 강열한 이미지의 여성들을 창조했다. 색채와 인체의 어느 한 부분의 강렬함을 표현하는 신비로운 매력을 지니고 있는 그의 그림들은 오늘날에도 전 세계 애호가들의 열광적인 시선을 받고 있다. 클림트의 그림에는 사람의 전 생애가 들어있다. 자연의 순환과 주기를 다루면서 시간을 초월하여 그림 속에 자신의 철학을 그려 넣었다.

떨어진 꽃잎이 애처롭지 않고 화려하게 느껴짐은 반 고흐의 그림 속 해바라기하고는 다른 삶을 바라보는 그 나름의 생성과 소멸의 시선을 생명의 규칙에 대한 저항으로 여성을 바라보는 신비로운 시선과의 합일점을 이루고 있는 듯이 느껴진다. 서로 다른 색채를 대비시키면서 묘한 조화를 이루어가는 상상의 세상으로 동화를 연상시키게 한다. 이러한 클림트의 그림 한 점이 주제가 되어 영화는 스토리를 전개한다.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은 황금빛의 색채와 그녀의 화려한 목걸이와 그 화려함 뒤에 숨어있는 그녀의 눈빛으로 시선을 끌고 있었다. 클림트의 그림 ‘키스’를 처음 보던 순간에 느꼈던 섬세한 터치는 아니었으나 그녀의 초상화에 담긴 색채와 모델의 주인공이 지니고 있는 눈빛은 그의 그림이 지니고 있는 환상적이며 또한 인간의 뒷면에서 보이는 묘한 눈빛은 동일한 느낌을 전달하였다.

Lady in gold는 클림트의 후원자였던 아델레의 초상화이다. 현재 이 그림은 에스티로더 창업자의 아들인 로널드로더가 1,350만 달러에 사들여 현재 뉴욕 맨허튼 노이에갤러리에 전시되어 있다.

바흐어의 조카이자 영화의 주인공 마리아알트만(헬렌 미렌)은 과거 함께 미국에 이민을 오게 되었던 친구의 아들 렌디쉔베르크(라이언레이놀즈)에게 의뢰한다. 귀족 가문의 여인이 모델이 된 그림 바우어의 초상은 나치에 의하여 유대인을 학살하는 과정에서 가족 중 유일하게 미국으로 망명하여 살아남은 그녀가 유물환수에 관한 재판을 시작하면서 변호사 초년병인 렌디쉔베르크가 개입을 하게 된다.

처음에는 관심이 없어 했던 그는 점점 시간이 흐르면서 무려 8년간이 유물환수의 재판에만 자신의 시간을 할애한다. 나치와 유대인 그리고 오스트리아. 시작점에 불과했던 한 변호사 초년병이 국가를 상대로 유물환수에 대한 법 조항을 치밀하게 풀어가면서 역사가 개인을 지배하려 하는 권력에도 인간 내면이 지니고 있는 정신세계가 그 역사를 역류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국가가 개인에게 행사하는 막강한 권력이 결국은 유물환수재판에서 국가가 돌려주려 하지 않는 개인의 초상화를 돌려받게 되는 재판 과정을 치열하게 그려내고 있다. 영화는 실화라서 더 강력한 느낌을 전달하고 있었다. 영화의 줄거리보다 더 실감 나는 것은 클림트에게 그림을 의뢰하였던 그 가문의 막강한 부와 그림을 돌려받은 후의 담담한 주인공의 표정이었다.

그림값이 중요한 것이 아닌 가문의 기억을 소중히 여기는 그녀가 지니고 있는 삶의 시선이 인상적이다. 사람들은 흔히 추억이라는 것을 말하면서 그것들을 기억 저편으로 소멸시켜가지만 그래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은 자신의 추억들이 있어서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갈등의 구조에서도 기어코 찾아내고 싶은 시간이 우리 삶의 어느 한구석에 가치로 자리하고 있음이다.

클림트의 그림이어서 소중한 것이 아니다. 인간이 지니고 살아가야 하는 오래된 것들 속에서 클림트의 그림 속 황금빛처럼 반짝이는…. 그래서 영원히 우주공간에서 멈추게 하고 싶은 소중한 기억의 시간으로 그것은 충분히 보석의 기능을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