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타루! 참으로 낭만적인 지명(地名)이다. ‘모래 속에 흐르는 강’이라니. 이런 지명(地名)은 어디서고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다. 오타루라고 이름 붙인 사람은 홋카이도의 원주민인 아이누족들이다. 강이 모래 속을 흐르다니 너무나 동화적이고 로맨틱한 이름을 가진 오타루를 찾아갔다.
우리에게 홋카이도의 오타루는 이와이 순지 감독의 영화 ‘러브 레터’의 배경으로 잘 알려진 곳이다. 주인공 와타나베 히로코(나카야마 미호)가 눈부신 설원을 배경으로 외치던 “오겡키데스카(おげんきですか: 잘 지내시나요)”라고 외치던 장면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때문에 언젠가는 한번 가보고 싶었던 도시였다. 겨울이 아니니 눈부신 설원이야 만날 수 없고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오타루 운하를 만나러 갔다.
바닷물을 육지로 끌어들여 만든 운하로 1914년부터 9년에 걸쳐 완성되었다고 한다. 오타루 전성기에는 떠오르는 항구도시답게 수많은 은행과 창고가 운하를 따라 즐비하게 서 있었다고 한다. 사실 운하라고 해봐야 지금은 대부분 매립되고 시민들의 거센 반대로 인해 일부분만 남아있다. 운하로서의 그 기능이 끝났지만 저녁마다 63개의 가스등이 켜지는 세계적인 관광명소가 되었다.
길이라고 해봐야 기껏 1.1Km. 천천히 걸어도 십여 분 남짓. 사실 운하라는 게 뭐 그리 아름답겠는가. 그저 토목공사를 하여 물길을 만든 것뿐이지 않은가. 그 물길 옆에 옛날 번영하던 항구도시답게 멋없이 지어진 창고가 다인 것이다. 어찌 보면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을 풍경이다. 그 을씨년스러웠을 풍경이 운하의 창고로 사용됐던 낡은 건물로 식당가로 변모해 북해도의 여름과 겨울을 즐기는 젊음과 낭만의 공간으로 바뀌었다. 오타루는 인구가 15만쯤 되는 작은 도시다. 그러나 연간 600만 명의 관광객이 다녀가는 북해도 최고의 관광도시가 될 수 있는 것은 옛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낸 도시의 정체성 덕분이다.
오타루 운하를 따라 서있는 가스 가로등이 이채롭다. 그 가스등 밑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문득 이 가스등도 '잉그리드 버그만'이 주연한 영화, ‘가스등’처럼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할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떠오른다. 확인할 수 없는 아쉬움을 얼른 떨쳐버리고 오랜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운하를 따라 걷는다.
회색빛 긴 머리를 질끈 동여맨 여인이 운하 곁에 이젤을 펴놓고 그림을 그리고 있다. 옛 창고 벽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며 바람에 흔들리는 이름 모를 풀들을 그려내고 있다. 그 모습이 이 풍경과 너무도 잘 어울렸다. 사진 한 장 찍자고 할까 하다가 방해될까 싶어 돌아선다.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창고 식당 몇 개의 문이 열려있다. 연인들이 운하를 바라보며 한가롭게 앉아 담소를 나눈다. 표정까진 볼 수 없어도 행복감이 내게까지 전해져 이 순간 행복하다.
안내하는 분이 이 운하는 밤 풍경이 더 아름답다고 말한다. 저녁 어스름이 운하에 내리고 육십여 개의 가스 가로등에 아련한 불빛이 들어오면 오타루 운하의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다고 한다. 그 밤 풍경이 너무도 이국적이고 아름다워 많은 영화나 드라마, 광고 속에 등장하는 곳이라 말한다. 밤 풍경을 볼 수 없는 것이 아쉽다.
밤 풍경을 볼 수 없는 나로서는 낮이라도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이며 늘어서 있는 가스 가로등은 나를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문득 우리나라에는 가스등이 없었을까 생각해 보지만 기억 어디에도 없다. 그러니 더 이국적이다. 일본의 근대화가 시작된 메이지·다이쇼 시대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창고와 흘러가는 강물은 멋지게 어울렸다. 간이 나무의자에 앉아 강 풍경을 바라보는 노부인도 운하 풍경 속에 스며들어 한 폭의 그림 같다. 마치 유럽의 어느 소도시를 연상시킨다.
운하를 거슬러 올라오면서 곰곰이 생각에 잠긴다. 사실 운하라 하지만 다 매립되고 손바닥만 하게 남은 운하를 살려낸 일본인들의 감각이 부럽다. 반대를 한 소수 시민의 의견도 들어준 것이 부럽다. 손바닥만 하게 남긴 운하에 숨을 불어넣고 이야기를 만들어 내어 쇠락해 가던 오타루를 관광의 도시로 탈바꿈시킨 그들의 발상의 전환이 부럽다.
운하를 떠나는 발길이 무겁다. 마음 한구석에서 우리의 서울 인사동이 걸린 탓이다. 제 빛깔을 하루가 다르게 잃어가는 인사동이다. 인사동 곳곳에서 현대적인 건물들이 들어서고 있다. 흥청거렸을 육의전도 사라지고 피맛골도 사라졌다. 저러다가는 인사동마저 사라질까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