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밖에 장대비가 쏟아진다. 폭우가 내리고 천둥이 치는 날 혼자 생일을 맞이하면서 쓸쓸해 하는 40대의 남자 동욱! 동욱의 표정과 노래에서 외로움이라는 단어가 무대 위를 돌아다니기 시작한다. 그것은 무대를 배경으로 나타나는 천둥소리와 빗소리보다 더 진한 울림을 전달한다.
195년에 초연을 하고 2008년 일본으로 라이선스 수출을 하여 2011년 4000회를 돌파하는 공연을 지속시키고 있는 뮤지컬 <사랑은 비를 타고>가 20주년을 맞이하여 4년간의 준비기간을 마친 후 관객을 만나고 있다.
초연의 시작은 젊은 남녀의 사랑이야기가 주제였는데 이번에는 형제애라는 새로운 내용으로 각색이 되어 관객을 맞이하고 있다. 무대장치도 단순하게 세 사람만의 출연으로 이야기를 끌어가지만 일반적으로 이어지는 남녀의 사랑이야기가 아닌 잊고 살아가는 일상의 이야기로 비처럼 촉촉하게 가슴을 적셔가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무대 위에서 펼쳐진다.
24살에 부모님을 여의고 갑자기 가장이 된 동욱(임기홍)은 두 여동생과 막내 동현(양동원)을 뒷바라지 하느라 마흔이 되어도 결혼도 하지 못한 채 혼자 살고 있다. 지칠 줄 모르게 동생들을 향한 사랑을 지니고 있는 동욱이지만 그는 이제 젊음을 상실해가는 40대가 되었다. 피아노를 치는 그의 손가락도 조금씩 그가 지쳐가고 있는 것처럼 마비가 오기 시작한다.
무대에 불이 꺼지고 어두운 거실에 검은 그림자 하나가 들어온다. 자신의 사랑도 삶도 포기한 채 동생들의 뒷바라지만 하는 형이 부담스러워 군 제대 후 7년간 외항선을 탔던 막내 동현이 돌아온 것이다. 서로에 대한 반가움은 잠시로 지난 7년간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감정이 어긋나기 시작하고 마침내 그 감정의 마지노선에 도달하였을 때 결혼 축하 업체의 여직원 유미리(웨이: 크레용팝)가 형제 앞에 나타난다. 평범하지 않은 옷차림으로 난데없이 결혼을 축하한다며 이벤트를 벌려가고 막내 동생 동현은 푼수끼 가득한 그녀가 펼쳐가는 이상한 상황에 호흡을 맞추기 시작한다.
세상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을 것 같은 사랑의 감정을 숨기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족이라는 주제로 펼쳐가는 여름날의 장맛비 같은 이야기들이다. 거세고 황량한 들판에 쏟아지는 폭우가 아니고 여름이면 우리가 기다리지 않아도 찾아오는 당연한 여름의 일상으로 여겨지는 장맛비처럼,누구와 함께 하는 시간에도 감동을 담아갈 수 있는 한 방울의 비처럼 촉촉하게 가슴을 스며가는 이야기로 여름날 마로니에 공원의 시간을 걷게 하였다.
삶은 선택의 이어짐이라던 누군가의 말을 생각했다. 누군가의 삶에 울타리가 되어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순간에도 후회하지 않는 선택을 할 수 있는 대상인가가 매우 중요하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지닌 가슴 전부를 내어 줄 수 있음은 그 이후의 상황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시간이 지난 후에 나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인지가 중요하다. 선택의 결과 뒤에 남겨지는 그 쓸쓸함도 동욱은 아끼고 사랑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가 부르는 노래는 무대 위에 들려오는 천둥소리보다 더 크게 여름날의 빗속에서 아름다운 메아리가 되어 남겨지고 있었다. 더 이상은 막내가 아닌, 이기심을 변화시켜가는 모습으로 동현은 형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성장의 모습을 노래로 담아내고 있었다.
동현이 보낸 짧은 단어 하나로 동현이 지니고 있는 수많은 언어를 읽어내는 동욱의 마음은 우리들 모두가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의 필요함이다. 보여지고 표현하는 형식적인 글자의 나열이 아니고 동욱과 동현이 가슴에 담고 있는 사랑으로 가능한 마음의 교감이었다. 오히려 표현하지 못하는 마음이 더 깊어서 그 깊이를 알 수 없음이다.
"사랑은 더 많이 사랑한 사람이 지는 게임"이라던 백남준의 아내 구보타 시게코의 말이 생각났으나 사랑은 게임이 아닌 희생을 전제로 하고 있다. 동욱이 형제들을 위하여 스스로의 사랑을 희생했던 순간의 그 느낌을 생각하게 하던 무대의 첫 장면이다. 가치를 잃은 사랑이 전달하는 쓸쓸한 외로움도 있겠으나 그래도 기어코 놓고 싶지 않은 끈끈한 가족애와 책임감이 동욱의 쓸쓸함에 버팀목이 되어주는 것이다. 내가 있어서 상대를 편안하게 할 수 있다는 위로로 동욱은 자신의 존재가치를 확인하고자 한다. 60대의 시니어가 아닌, 아직은 늙음을 깨닫지 못하는 40대의 남자가 느껴야 하는 외로움은 인간의 삶에 있어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영화나 뮤지컬이나 연극을 관람하러 갈 때 나는 미리 그 내용을 알고자 하지 않는다. 순백의 도화지에 나의 그림을 마음껏 그려가는 것처럼 내용에 구애 받지 않고 뮤지컬의 무대 위에서 들려오는 노래로 그 작품이 전달하는 의미를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내 나름의 의지이다. 뮤지컬을 선호하는 이유가 음악에 따르는 그 음률과 표정만으로 시작점에서 전체적인 느낌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극중에서 보여지는 타인의 삶을 통하여, 수없이 많은 삶의 시간들 중에서 내가 선택하였던 나의 시간들이 진정으로 후회는 없었던 것인가를 생각하던 시간이었다. 그래도 한쪽 손으로 건반을 두드릴 수 있는 두 사람이 두 대의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무대 위를 정리하는 마지막 시간에 깨닫게 되는 것은 인생은 혼자가 아닌 "너와 나" 라는 사실이었다. 나의 한 손과 너의 다른 손으로 아름다운 삶의 화음을 이어갈 수 있음은 "하나를 버리면 얻어지는 또 다른 것" 을 배우던 가슴 따스한 시간으로, 아직은 장맛비가 머물러 있는 숲에서 들려오는 매미소리가 그들이 연주하던 피아노소리처럼 들려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