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망각하지 않기 위해 '아리랑'이 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옥비의 한이 서린 절규 뒤로 김수영 시인의 시 '풀'이 비장한 멜로디에 맞춰 울려 퍼진다. 송수익은 옥비에게 죽지말고 꼭 살아남으라고 목청껏 외친다. 바람에 꺽이지 않는 풀은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하던 선조들의 모습과 닮아있다. 고선웅 연출이 의도한 '애이불비(哀而不悲)'. 절제있는 배우들의 연기에 음악이 더해져 애잔한 슬픔이 가슴 속에서 퍼져나간다.

신시컴퍼니가 3년을 준비하여 만든 뮤지컬 <아리랑>(연출 고선웅)의 첫 공연이 지난 7월 11일 막을 올렸다. 10년이 넘게 뮤지컬 <아리랑>을 꿈꿔온 박명성 프로듀서는 "떨리는 마음으로, 설레는 마음으로 두려운 마음으로 뮤지컬 <아리랑>을 내놓는다"고 말했으며 "2007년 창작뮤지컬 <댄싱 섀도우> 이후 가장 모험적이고 위험한 도전이지만 광복 70주년을 맞아 우리의 아픈 과거를 한번은 매듭지어야 그 기반 위에서 미래의 꿈과 희망을 펼쳐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총 12권 분량의 소설 <아리랑>을 뮤지컬로 옮기기엔 방대했기에 소설 속 수백명의 등장인물은 감골댁 가족사를 중심으로 재편되고 시간적 배경 역시 20년대 말까지로 한정되었다. 극은 7명의 인물이 민족의 아픔을 대변하며 이야기를 이끌어나간다. 빚 20원 때문에 큰아들 영근을 하와이 역부로 팔 수 밖에 없었던 감골댁과 그의 딸 수국. 옥비의 오빠이자 수국과 서로 사랑하는 득보. 몰래 수국을 사모하는 일제 앞잡이 양치성. 나라의 독립을 위해 발벗고 나서는 양반 송수익과 수국의 친구이자 송수익을 사모하는 옥비. 사랑조차 쉽지 않았던 그 시절 감골댁네 사람들의 역경을 이겨내는 모습이 우리 역사를 대변한다.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힌 송수익은 감옥에서 옥비와의 과거를 회상한다. 이 때 여인의 울음 소리같은 해금 연주에 나지막하게 울리는 옥비의 '사철가' 한가락은 뮤지컬 <아리랑>의 최고의 장면이다. 자연 앞에서 초라하게 늙어가는 인간의 무력함과 인생무상함을 표현하는 사철가는 죽음 앞에선 송수익이 느끼는 감정을 그대로 투영한다. 국립창극단 소속 국악인 이소연의 옥비 캐스팅은 참으로 절묘하다. 극중 판소리가 흘러나오는 장면은 손에 꼽지만 그녀의 소리는 가슴을 울리는 묘한 매력이 있다.

또 진도아리랑을 부르는 장면도 빼놓을 수 없는 장면이다. 독립투사 송수익과 그를 따르는 이들은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도 신명나게 아리랑을 불러 재낀다. 지삼출(최명경)의 걸쭉한 목소리는 모두에게 번져 하나의 목소리로 모인다. 신명나는 진도아리랑 가락에 어깨춤이 절로 난다. 분명 흥이 나는 노래가락을 듣고 있는데 슬프다. 힘들고 슬픈 상황에 부르는 아리랑이야 말로 고선웅 연출이 의도한 진정한 애이불비(哀而不悲) 정신이 아닐까 싶다.

뮤지컬 <아리랑>은 슬픈 내용이지만 생각만큼 무겁게 진행되지는 않는다. 유머러스한 장면을 중간 중간 심어 놓음으로써 관객들에게 웃음을 선사하며 진한 감동까지 이끌어 낸다.

뮤지컬 <아리랑>은 오는 9월 5일까지 LG아트센터에서 공연을 이어간다. 만 7세 이상 관람가. 6만~13만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