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08.12 02:56

전철을 타고 보면 열에 아홉은 스마트폰에 코를 박고 있다. 경로석만 예외랄까. 그런데 어쩌다 책을 읽고 있는 사람이 눈에 띄면 젊은이든 노인이든 다시 보게 된다. 대세를 따르지 않는 모습이 우선 멋있어 보이고, 왠지 똑똑한, 그 의미의 영어 그대로 ‘스마트’한 사람일 것만 같다. 폰이 아니라 사람 자체가 스마트해 보이는 것이다. 그렇게 보이고자 많은 돈을 쓰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책 읽기라면 돈도 별로 안 들고 점점 희소성까지 돋보이니 전철 안 멋쟁이 되기에 십상일 텐데…. 도서관을 이용하면 그나마 책값도 들지 않을 테고…. 앉아가는 여유라도 누릴라치면 곧잘 드는 나만의 생각이다.

얼마 전 메르스란 급성질환이 위세를 떨쳤을 때는 동네 경로당도 한동안 문을 닫아야 했다. 그 바람에 오갈 데가 없어진 어르신들이 공원 벤치에 나와 앉아 시간을 죽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책을 즐겨 읽으시는 분들은 달랐다. 내가 아는 몇 분만 해도 모처럼 바깥 행사나 모임에 신경 쓰지 않고 도서관에서, 집에서 책을 읽느라 지루할 틈이 없었다고 했다. 집 근처 도서관을 지날 때면 1층 어르신 코너의 유리창 너머로 책 읽는 어르신들의 모습을 쳐다보곤 한다. 멋진 노년이 따로 없지 싶어서인데, 늘 같은 얼굴들을 보게 된다.


책 선물은 사양?

그도 그럴 것이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책이고, 갈 수 있는 도서관이지만 아무나 가까이하지는 않는 까닭이다. 게다가 나이 들면서 책에 대한 호불호가 갈려 가는 것 같다. 지인 중에 ‘책 선물은 사양’이라고 대놓고 말하는 이가 있고, ‘집에 책꽂이가 없다’고 돌려 말하는 이도 있다. 이들에게 책을 따돌리는 ‘책따’라고 우스갯소리를 한 적이 있다. 그러나 학교에서 책 읽는 친구들을 따돌리는 실제 ‘책따’ 현상이 있다는 보도를 보고는 아연실색해 더는 농담도 건넬 수 없게 됐다. 반면, 책 사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고, 번역본이 아닌 원본을 굳이 찾아 읽거나, 원본을 읽기 위해 새로 언어를 배우기까지 하는 친구들도 있다.

[시니어 에세이] 도서관은 왜 가요?

내 경우는 도서관이 2주간 동안 빌려주는 최대 5권의 절반쯤이라도 따박따박 읽으면 족하다고나 할까. 어렵거나 두꺼운 책은 그마저도 쉽지 않다. 그래도 도서관에서 빌려오고, 독서회에서 과제인 책이 이어지다 보니 어떻게든 기한 내 읽어내는 ‘장치’를 갖춘 셈이다. 빌려온 책은 기억하고 싶은 대목마다 포스트잇을 붙이며 읽고, 다 읽은 후 이를 떼면서 컴퓨터로 쳐서 파일에 저장해 놓으면 복습이 되거니와 나중에 참고하기도 편하다. 하지만 샀거나 선물로 받은 책들은 언제든 읽을 수 있다는 생각에 마지막 장을 넘기기가 마냥 지체되기 일쑤다. 그래서 도서관 책을 즐겨 읽으려 한다. 


“텔레비전을 줄여야 하는데…”

며칠 전 라인댄스 강좌가 끝난 후, 여느 때랑 달리 마음이 급했다. 점찍어 놓은 책을 누가 먼저 빌려 가면 어쩌나 해서였다. 나보다 나이가 위로 뵈는 분이 옆에서 “어디를 가기에 그렇게 서두르느냐?”고 물었다. 도서관에 간다니까 재차 묻는 것이었다. “도서관은 왜 가요?” 답이 뻔한 질문을 받자니 ‘사오정’처럼 엉뚱한 답으로 웃게 할까도 싶었지만, 얘기가 길어질까 봐 참았다. “책 빌리러 가지요.” “자주 가요?” 고개를 끄떡여 보이니까 그분은 한숨부터 쉬었다. “어휴, 나는 도서관이나 책하고는 담을 쌓고 살아서…. 그저 텔레비전이니까.” 

갈 길은 바빴어도 한마디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도서관에 책 말고도 좋은 거 많아요. 교양이나 취미 강좌도 있고요. 다니다 보면 책과도 친해지실 거예요.” “텔레비전을 줄여야 하는데 그 앞에 앉는 게 습관이 돼서….” “요즘처럼 더울 땐 피서하기에도 안성맞춤인 곳이에요.” 더 길게 대화를 나눌 수 없어 아쉬웠지만 누구에게나 거저 열려있는 그 ‘보물창고’를 찾지 않는다는 게 못내 안타까웠다. 특히 여름이면 방학과 휴가를 맞은 학생과 직장인, 가족을 위한 여러 가지 특별 프로그램들이 펼쳐지는 데 말이다.

내가 즐겨 찾는 도서관만 해도 요즘 ‘길 위의 인문학’을 진행 중인데, 행사의 일환인 파주출판단지 견학에 나도 참가해 의미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도서관이 읽는 곳에서 체험하는 곳으로 달라지고 있는 덕분이다. 체험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지역 활성화에 중추적 역할을 하는 도서관도 있다. 지난해인가, 공병호 경영연구소 공병호 소장이 한 신문에 쓴 일본 사가 현 다케오 시립도서관이 그렇다. 인구 5만 명의 소도시 도서관이지만 연간 이용자가 100만 명에 가깝고, 이 중 40%는 ‘한번 꼭 가봐야 할 이색 도서관’이란 소문에 멀리서 찾아오는 사람들이란 것이다.


스트레스 해소방법 1위

민간 업체의 위탁운영으로 도서관이 북 카페처럼 변하면서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거나, 일부 열람석에서는 자유롭게 대화도 할 수 있게 됐다고 한다. 서고를 없애 장서 20만 권을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는 데다, 잡지 전문서점과 DVD 대여점이 생겼고, 휴관 일도 없이 밤 9시까지 운영한단다. 이로 인해 외부에서 찾아온 이들로 주변 음식점이며 숙박 시설 이용이 증가하면서 지역이 활기를 띠고 있다는 얘기다. 도서관을 상업시설처럼 운영한다는 비판도 있다지만, 적어도 “도서관은 왜 가요?” 묻는 이들이 없도록 만든다면 어느 정도 도서관의 변신은 무죄가 아닐까. 

그럼에도 책은 도서관의 본질일 터, 누구보다도 은퇴한 실버세대에겐 더없이 좋은 서재요, 나처럼 책을 빌리는 이들에겐 최고의 서가다. 거기 꽂혀 있는 수많은 책을 쳐다보기만 해도 건강하게 오래 살아서 다 읽고 싶다는 의욕이 솟구치며 걱정이나 우울도 사라진다. 그러잖아도 최근 영국의 한 대학 연구팀은 갖가지 스트레스 해소법들을 측정한 결과, 1위는 독서로 판명됐다면서, 무슨 책을 읽든 작가가 만든 상상의 공간에 푹 빠져 일상의 걱정 근심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으면 된다고 했다. 바로 그런 책 속에 ‘도서관은 왜 가요?’의 정답이 들어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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