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08.18 10:38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을 커다랗게 뜨고 들여다본다.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손을 들어 주먹을 살포시 쥐고 노크해 본다. ‘익었니? 안 익었니?’ 아무 대답이 없다. 맑은소리가 메아리치는 것도 같고, 둔탁한 소리가 메아리치는 것도 같고. 다시 슬슬 만지며 살펴본다. 검은 줄이 꼭지에서부터 밑바닥까지 힘차게 죽 그어져 있지만 이것이 선명한 건지 아닌지 알 길이 없다.

나는 지금 아파트 옥상 상자 텃밭에서 열린 수박 앞에 앉아서 이 수박이 익었는지 안 익었는지 익은 수박에 관한 내가 지니고 있는 수박 지식을 총동원해서 살펴보는 중이다. 그냥 ‘뚝’ 땄다가는 작년에 땄던 수박처럼 설익은 수박을 만나게 되는 낭패를 다시는 겪고 싶기 때문이다.

[시니어 에세이] 도시 농부의 텃밭 일기 ①수박 파티

잘 익은 수박 고르는 비결은 두드려보고 소리를 들어보라고 했다. 둔탁한 소리는 잘 익었다고 한다. 너무 둔탁하면 너무 익어 물러지고 있는 거란다. 가볍고 높은 소리가 나면 안 익은 수박이니 ‘뱅엥’하는 약간 긴 울림의 맑고 저음의 소리가 나면 가장 적당하게 익은 수박이라는데 내게는 그 정도의 소리를 분간할 수 있는 청음(淸音) 실력은 가지고 않다. 아마도 그런 청음을 가지고 있으면 지금쯤 월요일마다 가요무대에 서서 노래를 부르거나 작곡자로서 이름이 나 있으리라.

다음으로는 수박의 몸체를 살피는 일이다. 수박 엉덩이 똥꼬의 크기가 크면 잘 익은 수박이고 반대라면 잘 안 익은 수박이라는데 수박 똥꼬를 몇 번이나 봤다고 어느 만큼 해야 큰지 작은지 알 것이 아닌가. 거기다 보태면 수박의 검은 줄무늬가 선명해야 한다는데 그도 어느 정도가 진한 건지 알 수가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작년의 실패를 거울삼아 올해는 기어코 익은 수박을 따보리라 다짐했다. 어미 줄기, 아들 줄기, 손자 줄기를 만들어 가는 순치기야 무슨 말인지 알쏭달쏭 하지만 대충 흉내를 내고 나니 수박꽃이 노랗게 피어났다. 고민이다. 저 녀석을 어찌 길러 달콤하고 시원한 수박 맛을 볼 수 있을까? 인터넷을 뒤졌다. 수박이 얼마만큼이나 지나야 익는지 살펴보기 위함이다. 여기저기 뒤지니 대체로 수박꽃이 핀 지 50일이 지나야 수박이 익는다고 했다. 달력에 표시해 두었다.

그 표시한 날이 어제다. 혹시나 싶어 그제도 어제도 따지 못하고 오늘도 들여다보고 있다. 딸까? 말까? 마음은 시시각각 변덕을 부린다. 요즘 날씨만큼이나 변덕이 죽 끓어오르듯 한다. 그때 여섯 살 손자가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오며‘ 할머니~’ 한다. 집에 찾아왔다가 내가 없으니 으레 옥상 텃밭에 있으려니 하고 올라온 것이다. ‘그래 따자, 손자에게 수박 따는 맛을 보여 주자. 안 익었으면 어때! 손자에게 소중한 경험 하나 만들어 줘야지’

손자에게 가위를 주고 자르라고 했다. 손자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다. 평소엔 ‘수박 떨어진다고 만지지도 못하게 하더니 그 수박을 자르라니 이게 웬 횡재냐’ 하는 얼굴이다. 손자가 가위로 싹둑 자른다. 수박 줄기가 굵어 잘리지 않는다. 손자는 안 되겠는지 자세를 고쳐 잡으면 다시 힘주어 가위질을 한다. 고사리 같은 손에 힘이 가득 들어갔다. 순간, 수박 줄기가 싹둑 잘리며 손자의 얼굴이 환해진다. 얼굴 가득 뿌듯함이 넘쳐난다.

수박이야 아파트 옥상 상자텃밭 속에서 자랐으니 작다. 작아도 한참 작다. 시골 어느 수박밭에서 자랐다면 아마도 보는 순간 농부의 손에 의해 멀리 던져졌을 수박이다. 그러나 상자텃밭에서 자란 이 작은 수박 하나가 너무도 대견하다. 그 마음을 읽었는지 손자가 자기가 들고 가겠다고 한다. 아파트 계단을 내려오는 손자의 발걸음이 유난히 가볍다. 그 가벼움이 아파트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빛을 발했다. 현관에 들어서서 신발을 벗으려는 손자의 손에서 수박이 떨어져 나갔다. ‘앗’하는 순간 수박은 반으로 쫙 갈라졌다.

[시니어 에세이] 도시 농부의 텃밭 일기 ①수박 파티

그 순간이다. 그리도 보여주지 않던 수박의 마음이 활짝 열렸다. 빨갛고 연한 속살이다. 천진하리만큼 순수하면서도 열정적이다. 진하지 않은 살포시 수박의 향기가 침을 꼴깍 넘어가게 유혹한다. 거실 바닥에 흩어진 수박의 빨간 속살을 하나 집어 들어 입안에 밀어 넣는다. 사르르 녹아들어가는 맛이 일품이다. 달다. 달아도 너무 달다. 다시 한 조각 들고 한 입 베어 문다. 사각거리는 소리는 이 한여름에 겨울눈을 밟는 발자국 소리가 났다.

수박을 떨어뜨리는 바람에 잠시 얼어붙었던 손자가 냉큼 수박 한 조각을 들고 입에 넣는다. 얼굴에 환한 웃음이 피어난다. ‘할머니! 맛있어요. 아주 많이요.' 한다.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깨진 김에 수박화채를 만들어 온 식구가 둘러앉았다. 얼굴마다 환한 웃음꽃이 피어나는 저녁이다. 작은 수박 하나에 모두에게 행복한 저녁이다.

조선일보 조선닷컴

시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