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식탁에서였다. 식사를 시작하려는데 아들이 숟가락을 들더니 부엌 싱크대로 갔다. ‘쟤가 왜 저러나?’ 보니까 수도꼭지를 틀어 숟가락을 빡빡 닦는 것이었다. “뭐가 묻었어?” 식탁에 돌아와 암말 않고 국을 뜨던 아들이 한마디 한다. “잘 안 닦여져 있는 것 같아서요.” 말은 조용히 했지만 내 가슴을 요샛말로 ‘심쿵’ 하게 만들었다. ‘내가 당할 줄은 몰랐다’는 느낌이 몰려오면서 밥맛이 가셨다.
20여 년 전, 아이들이 한참 어릴 때 집에 일하는 할머니가 계셨다. 새벽에 출근하기도 하고, 야근도 잦았던 나로서는 아예 함께 살며 아이들을 돌보고 집안일을 거들어 줄 분이 필요했다. 간신히 일흔 넘은 할머니를 구했는데 당시 30대였던 내게는 마뜩잖은게 더러 눈에 띄었다. 특히 청결 문제가 그랬지만, 아이들을 맡기고 다니는 처지에 할머니의 심기를 건드리기도 조심스러웠다. 허나 숟가락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깨끗해 뵈지 않으면 할머니가 쳐다봐도, 아니 쳐다보길 바라면서 말없이 닦아서 먹었다.
앞으론 잘 닦아놓으라는 ‘무언의 시위’였다고 할까. 이제 내가 똑같이 겪는 셈이었다. ‘노안 때문에 잘 안 보여서 그렇거든.’ ‘손가락 힘도 전과 같지 않은데.’ ‘어쩌다 좀 덜 닦일 수도 있는 거지.’ ‘그렇게 깔끔할 거면 설거지를 도맡지 그러니.’ 할머니의 심기는 일부러 무시해 버렸던 내가 아들에게 쏘아붙이면 시원할 듯한 말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그럼에도 꿀꺽 삼킨 까닭은 ‘내가 한 그대로 받는구나’ 싶어서였다. 문득 영화 제목 ‘복수혈전’이 빗대지면서 피식 씁쓸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복수혈전 시리즈 같은 일들이 줄줄이 떠올랐다.
조심조심 느릿느릿
직장 시절, 선배 한 분은 얼굴 화장이 참 이상했다. 어떤 때는 뺨이나 이마의 한쪽만 파운데이션이 발라져서 그렇지 않은 쪽과 확연한 경계선을 이뤘다. ‘거울도 안 보고 했나?’ 속으로 흉을 봤다. 그러나 이젠 안다. 화장하다가 깜박 건너뛰고도 노안 탓에 그 부분을 못 본다는 것을. 얼마 전 나도 친구와의 만남에서 “오늘 눈이 부어 보인다”는 말을 듣고서야 늘 하던 아이섀도를 잊었음을 알아챘다. 언니의 흰 머리카락을 친절하게 뽑아 줬다가 되레 싫은 소리를 들은 기억도 있다. 누가 내게 그런 친절을 베푼다면 이제는 내가 펄쩍 뛸 판이다. 뽑는 대신 잘라줘야 날로 옅어지는 머리숱이나마 유지하며 염색이라도 할 수 있으니까.
돌아가신 내 아버지는 말년에 병약해지시면서 드링크 병뚜껑을 돌려 따는 것조차 힘들어하셨다. 대신 따드릴라치면 기어이 당신이 해내려고 애를 쓰셨다. 요즘 내가 그런 뚜껑을 힘들게 열 때면 힘줄들만 도드라졌던 아버지의 여윈 손이 떠오른다. 몇 번 눌러야 물이 내려지는 변기의 작고 동그란 버튼, 손목을 돌려야만 열리는 방문 손잡이, 세게 잡아당겨야 콘센트에서 빠져주는 플러그, 빨랫감을 넣고 뺄 때마다 몸을 굽혀야 하는 세탁기…. 전에는 힘이 들어간다는 인식조차 못 했던 일상의 사물들이 나이 들어가며 얼마나 더 많아질까.
대선배 한 분은 여든을 바라보는 연세에도 스마트폰과 노트북을 즐겨 사용하는 멋쟁이시다. 그런데 문제는 카톡도, 이메일도 빨라야 2~3일은 지나서, 그것도 채근해서야 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답답하기 그지없는 마음을 누르고 “스마트폰이 아니라 우편배달”이라고 에둘러 얘기 드린 적이 있다. 때로 맞춤법도 틀리고, 요즘 어법이 아닌 문자나 이메일을 보내시면 글도 나이를 먹는구나 실감한다. 그러나 온라인을 통한 해외 직구도 순식간에 해치우는 20대 아들이 볼 때, 국내 오픈마켓에서 장보기조차 조심조심 느릿느릿한 나야말로 또 얼마나 답답해 보일 건가.
“너 늙어봤냐”
나이 들수록 시간이 빨라진다는데 오히려 동작은 점점 느려지고 반응은 굼떠진다. 답답함을 넘어 사고 발생의 위험도 따른다. 팔순의 은사 한 분은 길을 가다가 상점이 문턱에서 거리로 걸쳐놓은 경사받침을 얼른 보지 못해 걸려 넘어질 뻔하셨다. 얼마 전에는 약속 시각에 꽤 늦으시기에 통화해 보니 전철역 출구는 제대로 나왔건만 아무리 찾아봐도 만나기로 한 장소가 안 보인다고 하셨다. 한 정거장을 지나치셨던 거였다. 다시 한참 기다리는 인내심을 발휘해야만 했다. 하기야 그분보다 훨씬 젊은 한 선배는 엉뚱한 날을 모임 일로 알고 나갔대서 함께 웃었는데, 머잖아 내가 인내심과 웃음의 원인 제공자가 될 수도 있음에랴.
한 친구는 팔순의 어머니와 외출 시 어머니의 옷매무새를 꼭 확인한단다. 상의 단추들 가운데 하나가 채워지지 않았거나, 화장실 이용 후 바지의 지퍼가 제대로 올라와 있지 않은 경우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두 가지쯤 잊은 어르신들을 전철 경로석에서 어렵잖게 보게 된다. 넓은 어깨와 바지통의 옛날 양복이 몸에 겉돌고 있는 남자 어르신들도 종종 본다. 유행이라고 다 따를 건 아니지만, 여자는 물론이고 남자도 늙어갈수록 차림새에 신경을 써야겠구나 싶어진다. 동시에 며칠 전 외출하는 내게 아들이 건넸던 말이 떠올랐다. “엄마, 바지통이 좀 넓은 거 아녀요?”
때때로 미술관에 작품을 감상하러 가면 불편하다 못해 화가 난다. 아무리 멋이 중한들 작품명을 명함만 한 표 딱지에 작게 써 붙여놨으니 젊은이들만 와서 보란 건가? 작품에 거리를 두고 감상하다가 제목을 읽으러 바짝 다가가기를 반복해야만 한다. 그러다 작품을 가리는 노년들에게 눈을 흘겼던 시절도 있었는데 말이다. 집안에선 부모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나도 슬슬 텔레비전의 볼륨을 키운다. 아들이 금세 자기 방문을 닫는다. 나 역시 그러지 않았던가. “너 늙어봤냐 나는 젊어 봤단다”는 유행가도 있지만, 노인체험센터를 찾아가서라도 팔순 노인으로 늙어들 봐야 부지불식간의 복수혈전이 사라지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