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08.24 14:16

꽃 같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 같다. 아침에 널어놓은 이불 빨래를 걷으러 아파트 옥상에 올랐더니 아침에 아파트 옥상 바닥에 널어놓은 고추들이 몸을 길게 누이고 쏟아지는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길쭉길쭉한 몸매를 곧게 펴고 꽃보다 더 붉은색으로 피어나기 위해 인고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꽃이야 하루 피고 지면 그만이지만 고추는 팔월의 뜨거운 햇살에 더욱더 붉게 꽃을 피우고 있다.

[시니어 에세이] 도시 농부의 텃밭 일기 ②고추를 말리며…

작년에 이어 올해도 고추를 다섯 그루를 심었다. 연작(連作)하면 병충해가 심해 아니 된다기에 작년에 고추를 심지 않은 상자텃밭을 골라 심었다. 쑥쑥 자라던 고추가 어느 날부터 시들거리는 느낌을 받더니 잎에 반짝이는 윤기까지 보였다. 무슨 일인가 싶어 살폈더니 아뿔싸! 진딧물이 침범했다. 약 치기는 뭐하고 목욕시키는 방법 밖에는…. 서너 차례 목욕을 시켜주었더니 진딧물이 물러가고 붉은 고추가 주렁주렁 달렸다.

작년에도 그랬다. 가지가 찢어져라 주렁주렁 달렸다. 여름부터 가을까지 붉은 고추를 지극 정성으로 말렸다. 비 오면 어쩌나, 물러지면 어쩌나. 마치 갓 태어난 아기 탈날까 봐 안절부절못하듯 말렸다. 그렇게 말린 고추가 두 근이나 되었다. 말려도 고민이 생겼다. 그 말린 고추를 들고 방앗간에 가자니 너무 적어 낯간지럽고 그렇다고 믹서기에 돌리면 맛이 없을 것 같고….

궁하면 통하는 법. 김치 명인으로 유명한 강순의란 분의 김치 담그는 모습을 보다가 기상천외한 방법이 생각났다. 김치 명인은 마른 고추를 확돌에 갈아 김치를 만들고 있었다. 그렇다면 확에 갈기는 꾀가 나고 두꺼운 비닐봉지에 더 이상 마를 것도 없는 마른고추를 담고 발로 밟았다. 발밑에서 마른 고추는 산산조각이 나고 더 이상 밟아도 부서지지 않는 순간 믹서기에 슬쩍 한번 갈아주었다. 물론 씨앗까지….

매워도 너무 맵다. 분명 안 매운 고추를 심었었는데 톡 쏘는 매운맛이 아련한 추억 속 고춧가루였다. 어느 해인가 고추 흉년이 심하게 들어 고추를 수입하여 배급한 적이 있다. 그때 배급받은 고추가 이리도 매웠다. 그럼 내가 기른 고추가 그 고추라고? 분명 아니다. 내 손으로 심고 내 손으로 거두었는데…. 그럼 뭐지? 내가 살림을 시작하고 이런 고춧가루를 만난 적이 없었다.

며칠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입맛이 변했다. 농가에서 고추 말리는 방법이 변했으니 태양초 맛을 낼 리가 없었다. 말이야 태양초라 하지만 요즘 순수한 태양초가 어디 있는가. 팔구월의 따가운 햇볕 아래 빨갛게 익어가며 마른 고추가 내 손까지 어찌 들어오겠는가. 김치 명인이라는 분도 고추도 손수 말린다고 하지 않았는가.

[시니어 에세이] 도시 농부의 텃밭 일기 ②고추를 말리며…

보물이었다. 내가 말린 고추는 어디서고 만날 수 없는 보물이었다. 약도 치지 않고 내 정성과 땀이 흠뻑 밴 보물이었다. 기계 속에서 하우스 안에서 말린 고추가 아니라 따가운 햇살에 홍 몸을 내어놓아 인고의 세월을 지나온 보물이었다. 그러니 맛이 다를 수밖에….

입맛이 변했으니 그냥 먹을 수는 없었다. 김치를 담글 때마다 사 온 고춧가루에 내가 길러 만든 고춧가루를 한 줌 넣어 김치를 담았다. 겉돌지 않는 붉은 빛에 톡 쏘는 맛. 김치 명인의 청산음료같이 톡 쏘는 맛을 자랑한다고 이름 붙여진 탄산 김치가 바로 이 맛이리라. 식구들이 김치 맛이 좋아졌다고 한다. 내가 김치 명인이 된 것 같아 으쓱거린다.

이불을 걷다 말고 폭염 속에 앉아 바구니에 담겨진 고추를 이리저리 뒤집어 준다. 쏟아지는 햇볕에 몸을 뒤척여야 더 좋은 빛깔과 향기를 지닌 꽃으로 태어날 테니까. 올해도 잘 마른 고추는 또 집안으로 들어와서 일 년 내 식구들을 식탁 앞으로 불러들일 것이다. 어디 이 고추뿐이겠는가. 햇볕에 영글어가는 사과나 누렇게 익어가는 호박들이 들어와 자리를 잡으면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와도 쓸쓸하지 않을 것이다. 집안으로 들어온 네가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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