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을 잊은 당신, 이젠 잘 보이십니까

아디는 인도네시아에 사는 중년의 안경사다. 70대 노인에게 시력검사용 안경을 씌우고 렌즈를 넣으면서 그가 묻는다. "이제 먼 곳이 더 잘 보이지요?"

9월 3일 개봉하는 영화 '침묵의 시선(The Look of Silence)'은 1960년대 중반 인도네시아를 휩쓴 대학살의 진실을 캐묻는 다큐멘터리다. 공산주의자이거나 공산주의자로 의심되는 100만명이 죽은 그 피의 소용돌이 속에 아디도 형 람리를 잃었다. 알고도 모른 척 숨죽여 살아야 했던 사람들에게 람리의 또 다른 이름은 침묵이자 망각이었다. 아디는 학살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가해자들을 찾아가 안경을 맞춰주면서 그 기억을 끄집어낸다.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은 전작 '액트 오브 킬링'에서 인도네시아 대학살의 가해자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살인을 재연하는 장면을 담았다. 그들의 언어로 그들을 옭아맨 셈이다. 후속작이랄 수 있는 '침묵의 시선'은 희생자 가족 중 한 명으로 아직도 형이 살해된 마을에 살고 있는 아디를 통해 가해자들에게 더 깊숙한 질문을 던진다. 밑바닥에 가라앉은 후회나 양심의 가책을 휘저어 떠오르게 하려는 전략이다.

피해자는 묻고 살인자들은 답한다. 50년의 침묵을 깨뜨리는 인터뷰 형식도 그렇지만 가해자들의 반응은 더 충격적이다. "이슬람교는 살인을 인정하지 않지만 적은 죽일 수밖에 없지" "그때는 혁명의 시대였다고" "이미 끝난 일을 뭐하러 들춰내?" "지금이 그때라면 자네도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 그들은 죄의식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 피해자들을 어떻게 강둑으로 끌고 가 어떻게 죽였는지 영웅담처럼 자세히 들려주기도 한다. 카메라는 현지 초등학교에서 그 대학살을 어떻게 정당화해 교육하는지 비추고, 공산주의 확산을 막아야 했던 미국이 수수방관했다는 사실도 당시 NBC 방송 화면으로 보여준다.

침묵은 '말하지 않고 말하기'다. 입을 닫음으로써 대화 상대방의 말을 가로막는 방패다. '침묵의 시선'은 피해자 가족의 삶을 50년 동안 짓누른 돌덩이를 가해자들 앞에 꺼내놓고 진실이 무엇인지 묻는다. 이 다큐멘터리는 미화된 학살과 억울한 죽음 사이의 거대한 틈새로 카메라를 들이밀고 그 상처를 클로즈업한다.

지난해 베네치아 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수상작이다. 이번에 방한한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은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학살이 가져온 결과를 보여주는 현재에 대한 다큐멘터리"라며 "침묵이 깨졌을 때 드러나는 고통에 집중했다"고 말했다. 혹시 모를 위험 때문에 제작진의 엔딩 크레디트는 대부분 '익명(anonymous)' 처리됐다. 인도네시아에서는 극장 개봉이 금지됐지만 온라인으로 상영할 예정이다.

다큐멘터리이지만 영상미가 돋보인다. 뿌연 헤드라이트를 켜고 어디론가 밤길을 가는 트럭, 말없이 흘러가는 강물, 풀벌레 소리와 호젓한 시골 풍경, 늙은 어머니를 태우고 가는 아디의 자전거 등 응시하는 듯한 카메라의 시선은 여전히 살아 있는 학살의 공포를 원경(遠景)으로 보여준다.

콩알들이 스스로 움직이는 대목이 가장 인상적이다. 처음엔 뜨거운 불판에 올려놓은 줄 알았다. '점핑 빈(jumping bean)'이라 불리는 이 콩알들은 안에 유충이 살고 있다고 한다. '침묵의 시선'은 아디의 어머니가 점핑 빈들을 손에 올려놓고 들여다보는 장면으로 닫힌다. 죽은 아들을 부르듯 중얼거린다. "어디 있니? 어서 나와…." 103분, 15세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