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09.04 09:58

여행이 잦은 철이다. 근래 젊은이들에게는 패스형 자유이용권으로 전국을 누빌 수 있는 기차 배낭여행이 인기 만점이라고 한다. 나이 든 이들에겐 죽기 전 해보고 싶은 ‘버킷리스트’로 해외여행이 선호된다. 그래도 요즘 ‘여름 휴가 국내 여행가기’ 캠페인 덕인가. 올여름엔 국내 여행을 다녀왔다는 얘기 또한 자주 듣는다. 나도 친구들과 경남 통영의 한여름을 맛보고 왔다. 어디든 간에 여건만 허락된다면 잠시 일상을 벗어나 떠난다는 것, 생각만 해도 여행은 가슴을 설레게 한다.

그 여행에 누구랑 함께 갈까부터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혼자 훌쩍 떠나도 그만이다. ‘여행 좋아하는 사람치고 나쁜 사람은 없다’는 말도 있다시피 여행에서 만나는 이들과는 쉽게 친구가 될 수 있으니 외로울 것도 없다. 되레 친한 이들과 좋은 시간 갖자고 떠난 여행에서 혹여 우울하거나 외로워질 수 있다. 하룻밤 정도면 몰라도 몇 날 며칠을 붙어 다니다 보면 서로에게 은근히 스트레스가 쌓이기에 십상인 까닭이다. 가까운 사이에 금이 가다가 급기야 쌓인 게 터져 나오면서 비틀어질 때도 있다.

얼마 전 내가 갔던 패키지 해외여행에서였다. 저녁 식사를 위해 한 대형 음식점에 들어서니 다른 여행사들을 통해 온 한국인 관광객들이 자리를 꽉 채우고 있었다. 단출한 우리 팀도 비집고 들어가 겨우 한 테이블을 차지하고 둘러앉을 수 있었다. 한숨 돌리고 있는데 옆 테이블에서 큰 소리가 났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분이 버럭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식사 자리에 늦게 나타났다고 아내에게 화를 내는 초로의 남편이었다. 적어도 7~8명씩은 함께 앉아있는 자리에서 남편에게 야단을 맞는 아내의 기분은 어떠했을까.


사람 사이 간격

[시니어 에세이] 여행 잘 다녀왔어요?

흘낏 봤던 내가 다 민망했다. 우리 팀 가운데 한 사람이 소곤댔다. “집에서 하던 버릇을 못 버려서 저래.” 식사가 나오기까지 이런저런 얘기들이 이어졌다. “결국엔 대판 싸우고 각자 다른 비행기로 집에 가는 부부도 봤다니까요.” “남편 친구 부부랑 넷이서 여행을 갔었는데 그 부부가 사사건건 어찌나 티격태격하던지 두 번 다시는 함께하고 싶지 않았어요.” “지난번 여행에는 언니와 동생지간이 왔던데 언니가 동생을 아주 잡더라고요.” “아이고, 엄마가 딸 둘을 잡는 건 또 어땠는지 아세요.”

“친구들 간에도 자칫 부딪칠 수 있는 묘한 갈등이 아슬아슬 비껴 지나갈 때가 종종 있잖아요.” “너무 가까운 사람끼리는 여행 가면 오히려 안 좋아질 수도 있는 거 같아요.” 반주가 한 순배 돌면서 안줏거리인 양 경험담들은 계속됐다. “코를 어찌나 고는지 밤새 잠을 못 잤다”고 투덜대자, “나는 코를 골지 않는다”며 우기다가 결국 싸움이 됐다는 경우는 차라리 에피소드에 가까웠다. 젊은 혈기에서라면 또 모를까, 인생을 웬만큼 산 사람들이 모처럼의 여행 며칠간을 참지 못하다니….

아니, 어쩌면 여행이니까 참느라 참았다가 터지는 것일 수도 있다. 남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나 또한 언니와 여행하며 겪은 일이다. 내게 마뜩잖은 점이 보였는지 언니는 하나둘 지적을 하고 때로는 핀잔도 줬다. 하지만 형만 한 아우가 없다는 옛말처럼 내가 부족하니까 그런 거겠지, 아랫사람이니까 참아야지 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마지막 날엔 나도 기어코 한마디 되쏘고야 말았다. 곧 화해는 했지만, 참는 김에 암말 없이 여행을 끝냈더라면 더 좋은 기억으로 남았을 텐데 말이다.

돌아와서 무엇보다 든 생각은 부부나 부모·자식, 형제자매, 친구든 간에 사람 사이엔 아무리 친밀하고 사랑한다 해도 약간의 간격은 있어야겠다는 것이다. 누구나 내 맘과 같을 수는 없으니, 서로 다른 점을 인식하고 존중하는 데 필요한 거리다. 그래야 내 견해만 고집하려 들지 않고, 어느 정도 예의도 지키려 노력하게 된다. 방송작가 김미라 씨의 글 한 대목이 떠오른다. “사람 사이, 그 간격이 너무 가까워지면 숨 막히고 너무 멀어지면 쓸쓸하다. 그 간격을 잘 조절한 사람은 평화롭고 잘 다루지 못한 사람은 외롭거나 아프다.”


‘득도’의 스파링

나이가 든 쪽에서 좀 더 조절의 노력이 필요할 듯싶다. 더 어린 쪽에서 나이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너그럽고 이해심도 많으리라는, 어른이나 어르신에 대한 환상이다. 내가 20대 땐 반세기만 살아도 굉장한 어른인 줄 알았다. 그러나 인제 보니 그게 아니다. ‘어른 옷을 입은 어린이’가 어른이란 말도 있거니와, 여기에 완고함과 서운함의 감정까지 곧잘 보태어진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가 아니라 “이래야만 한다”, 다르다가 아니라 “틀리다”는 완고함, 나는 이렇게 해줬는데 “너는 어찌 그럴 수 있냐”는 서운함이다.

어떤 경우에도 ‘그럴 수 있으려니’가 된다면 좀 좋을까. 그게 쉽지 않다. 거의 ‘득도’ 수준에 이르러야 가능해질 정도로 어려운 대상도 있다. 평생 안 보고 살 수 없거나 여행을 함께할 만큼 가까운 가족과 친지 중에도 있겠지만, 나 자신 또한 그런 대상이 될 수 있음에랴. 권투의 스파링인양 ‘그럴 수 있으려니’를 훈련해, 마침내 선수가 타이틀을 따내듯 득도의 경지에 닿게 해줄지도 모를 고마운(?) 이들이다. 있는 그대로의 너와 나를 수용하고 대처하는데 현재와 미래의 행복, 나아가 굵고 긴 삶이 달려있다지 않는가.

휴가 후 거무스름해진 얼굴로 나타난 내게 누군가 묻는다. “여행 잘 다녀왔어요?” 질문이라기보다는 휴가 잘 보냈느냐는 그냥 인사다. 즐거운 여행이었으리라는 전제가 이미 깔렸기에 답을 기대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정말 잘 다녀온 건지 스스로에게 답을 해본다. 나 홀로 여행이 아닐진대 어디가 좋았나, 어떤 음식이 맛있었나 이전에 함께한 이들과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게 간격을 잘 조절했는지, 그래서 서로 더 평화로워졌는지를. 만약 그렇다면 어디를 갔든, 어떤 음식을 먹었든 잘 다녀온 여행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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