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09.17 09:49

누군가 그랬다. 9월은 오르는 길을 잠시 멈추고 산등성 마루턱에 앉아 한 번쯤 온 길을 뒤돌아보게 만드는 달이라고…. 그건 산등성에 햇살 아래 앉아 쉬어 갈 수 있을 만큼 시원 하단 얘기일 것이다. 

모자도 없이 장갑도 없이 맨 손으로 그 뜨거운 햇살을 온 몸으로 받아내며 상자텃밭을 호미로 흙을 고르고 맨 손으로 김장 배추를 심고 무를 심었다. 너무 늦었다. 한 열흘쯤 전에 심어야 했지만 서울 강북구에서 처음 실시하는 ‘도시농업강좌’가 9월에 시작했던 관계로 어쩔 수 없이 오늘에서야 김장 배추 모종을 심고 무씨를 뿌렸다. 한 귀퉁이에 쪽파도 심고 부추도 심고 강사님 눈치를 슬슬 봐가며 이 것 저것 더 심으려고 몸보다 마음이 먼저 움직인다.

[시니어 에세이] 인생 2막의 꿈

요즘 우리 나이 또래의 화두(話頭)라면 단연 귀농이냐, 귀촌이냐이다. 자의든 타의든 명예퇴직이나 정년퇴직을 하고 시골에 내려가서 텃밭이나 일구며 슬슬 여생을 보내다 마감하고 싶다는 생각을 너도 나도 꿈꾸고 살지만 현실은 냉혹하다. 나 같은 사람도 농사라곤 농(農)자도 모르면서 막연히 동경을 하고 여기저기 기웃거려 보지만 그게 어디 마음이 간다고 선 듯 살던 곳을 박차고 내려가 살 수가 있는가 말이다.

사실 나도 퇴직을 하면 시골로 갈 생각이 굴뚝같았다. 귀촌을 해서 텃밭을 가꾸며 누군가를 위해 내가 가진 재능을 나누며 살고 싶었다. 시간만 나면 인터넷을 뒤지고 고향 친구들에게 전화를 하고, 오늘은 여기가 좋은 것 같고, 내일은 저기가 좋은 것 같고…. 꿈은 꾸지만 그게 현실로 옮기기엔 걸리는 게 너무 많았다. 퇴직을 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하루하루가 흘러가니 꿈은 꿈으로만 끝나는가 싶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아파트 옥상에다 상자텃밭 농사이다. 햇수로 벌써 짝퉁 농부로 살기 시작한 것이 3년차다. 다행이다 싶다. 많은 아파트들이 아파트 옥상 출입문에 자물쇠를 달아놓고 못 올라가게 하는데 내가 사는 아파트 옥상은 개방이다. 그 덕분에 상자텃밭에는 늘 싱싱한 채소들이랑 들꽃들을 키우고 산다. 취미 치고는 참 괜찮은 취미다.

어느 날, 강북구청 홈페이지에 들어갔다가 내 눈을 확 잡아 당기는 광고 하나. ‘본 강좌는 도시농업에 대한 관심과 열정으로, 향후 도시농업 관련 활동가를 계획하시는 구민을 위한 강좌입니다.’ 이게 뭐지? 서울에서 도시 농업 강좌? 도시농업활동가를 키운다고? 그 것도 내 좋아하는 무료! 공짜라면 예로부터 양잿물도 마신 댔는데….

[시니어 에세이] 인생 2막의 꿈

모집기간을 보니 8월 27일 목요일이다. 오전에 갈까? 오후에 갈까? 마음속에서 갈등이 일었다. 돈을 내는 강좌라면 오전에 가서 돈 내고 신청하면 그만인데 무료라니 왠지 좀 눈치가 보인다. 무료라고 ‘얼씨구나’ 하고 달려 왔다는 인상은 남기기 싫은 야릇한 마음이 인다. 그렇다고 오후에 가려니 탈락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든다. 그래, 오전을 살짝 비켜서 12시 50분쯤 가자. 그 시간쯤이면 이제 막 오후 근무에 들어 설 시간이니 내 체면도 좀 세우고 그리 늦게 신청하는 것도 아닐 테니까.

‘강북구 도시농업 강좌’를 신청하러 강북구청 교육지원과에 들어서니 12시 55분이다. 의기양양하게 작성해 온 신청서를 내 밀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그래도 중간쯤 일거라고 생각했는데 접수 번호가 29번이다. 선착순 30명이라 했는데 29번이라니. 나중에 들은 소리로는 이미 직원들 출근하기 전부터 대기하고 계셨던 분들이 계셨단다. 다들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 왔던 것이다.

꿈이 생겼다. 취미로 아파트 옥상 상자텃밭에 이것 저것 심어 기르던 것이 나의 인생 2막을 열어 줄 모양이다. 이 교육을 받으면 친환경 먹거리에 대한 관심이 지대한 요즘이다. 건강 증진에 참여도 하고 이 교육수료를 이수하고 일정한 절차를 거치면 스쿨 팜 강사, 도시농업 기획자, 도시양봉, 음식물퇴비화사업, 고소득 작물 판매 등 도시농업 전문가로서 자리를 잡을 수 있다고 한다.

작은 취미가 꿈이 되고 꿈이 현실로 옮아가는 것이다. 땀을 흘리며 9월을 뜨거운 햇살 속에 심어놓은 배 추 무가 자라듯 내 꿈도 자라 날 것이다. 다 탐이 나지만 내가 퇴직 전 하던 일을 방향만 약간 틀어서 ‘스쿨팜 강사’가 되고 싶다. 멀어져간 자라나는 새싹들을 다시 만나는 꿈을 꾼다. 또 복지관, 동 주민 센터 등에서 도시농업 강사로 활동하는 꿈을 꾼다. 꿈은 이루어진다 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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