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의 작은 마을 라쇼드퐁. 관광을 위해 스위스를 찾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생소한 이름이지만, 시계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루체른이나 취리히만큼이나 유명한 곳이다. 유명 시계 브랜드의 매뉴팩처와 본사가 위치한 스위스 시계 산업의 중심지가 바로 라쇼드퐁이기 때문이다.
스위스 사람들은 라쇼드퐁을 ‘스위스의 시베리아’라 부른다. 고지대인 데다 겨울이 유난히 길고 눈이 많이 내리기 때문이다. 10월 말부터 3월까지 거의 1년의 절반이 겨울이라고 한다. 이런 척박한 환경 때문에 라쇼드퐁은 스위스에서도 살기 힘든 도시로 통한다. 관광객뿐 아니라 스위스인조차 라쇼드퐁에 가본 적이 한 번도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해발 1000m가 넘는 고지대에 위치한 라쇼드퐁으로 가는 가장 빠른 방법은 기차를 이용하는 것이다. 뉴샤텔에서 20여 분 걸려 라쇼드퐁 역에 도착했을 때, 관광객이 가장 먼저 마주하는 것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기념비다. 우리나라 양동마을이나 하회마을처럼 라쇼드퐁과 르로클은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다. 스위스의 작은 마을인 이 두 곳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될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시계 때문이다.
오직 시계를 위한 계획도시
유라 산맥 깊은 골짜기에 자리 잡은 두 도시는 농사도 지을 수 없을 정도로 험준한 지형이다. 도시가 생겨난 것도 파리에서 이주한 시계 장인들과 제네바의 세공업자들이 본격적으로 시계를 제작하던 17세기 중반 이후였다. 라쇼드퐁과 르로클에서 시계를 제작하기 시작한 것은 정확히 1681년, 다니엘 잔 리차드가 이곳에 시계 제작 공방을 차리면서다. 이후 18세기까지 시계 제작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작업은 점차 분업화되었다. 분업화됨에 따라 각기 제조한 부품은 그것을 주문한 시계 제작자에게 전달되었고, 시계 제작자는 자신의 작업장에서 각 부품을 조립해 하나의 시계를 완성했다.
시계 부품을 만들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과 밝은 조명 그리고 시간만 있으면 시계 제조업의 중요한 부분을 함께 할 수 있었다. 그들에겐 자연광이 잘 들어오는 집과 기나긴 겨울이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엔 집에서 작업하던 사람들도 점차 작업 공간과 주거 공간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두 공간은 한 건물에 존재했다. 당시 세운 집과 건물들을 보면 오직 시계 제조에만 전념할 수 있는 작업실과 거주 공간이 긴밀하게 공존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생산된 시계 부품은 제네바나 파리에서 온 시계 제조업자에게 팔리기도 했다.
18세기 이후 스위스 시계는 멀리 중국에까지 팔리면서 수요가 늘었고, 시계 산업도 전문화되어갔다. 그러던 중 1794년 라쇼드퐁에 큰 화재가 나면서 마을 정체가 불길에 휩싸였다. 1833년과 1844년에는 르로클에서 화재가 나면서 마을 전체가 불타버렸다. 이후 두 도시는 더 합리적인 방식으로 도시를 재설계했고, 완벽한 시계 제조 도시로 거듭났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시계 마을
도시를 설계하는 데 가장 중요한 점은 작업을 위한 빛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확보하는 것이다. 겨울에 해가 빨리 지는 마을의 특성을 극복하기 위해 모든 집들을 해가 뜨는 방향으로 향하게 한 후, 일직선 형태로 늘어서게 했다. 19세기 도시의 규모가 커지고, 도로가 구분되면서 바둑판 모양의 도시가 비로소 완성되었다. 19세기 중반까지 두 도시의 인구는 꾸준히 증가했고, 그들 대부분은 시계 제조 분야에 종사했다. 산업혁명이 일어난 후 1857년에 두 도시 사이에 철도가 놓였고, 곧 뇌샤텔(Neuchatel)까지 이어졌다.
칼 마르크스는 저서 《자본론》에서 유라 지역의 시계 제조 산업의 노동 분업을 분석하면서 라쇼드퐁을 ‘거대한 공장 도시’라고 묘사할 정도로 두 도시는 스위스 시계 산업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 때문에 라쇼드퐁·르로클 시계 제조 계획도시가 200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유라 산맥의 깊은 골짜기에 자리 잡은 라쇼드퐁과 르로클은 도시의 배치부터 건물의 설계에 이르기까지 시계 제조업자들의 필요에 맞게 합리적으로 설계되어 있다. 유네스코는 수 세기를 이어온 정교한 방식의 장인 기술과 단일 산업 제조업 도시의 전형을 보여주는 이 두 도시의 보존 상태가 훌륭하고, 지금까지도 그 기능을 유지하고 있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시계의 본고장답게 수많은 브랜드의 본사와 매뉴팩처가 라쇼드퐁과 르로클에 위치해 있다. 제니스, 자케 드로, 티쏘, 율리스 나덴처럼 원래부터 라쇼드퐁과 르로클에서 시작된 유서 깊은 워치 브랜드부터 까르띠에, 샤넬, 디올, 루이 비통, 몽블랑 등 1990년대 중반 이후 본격적인 시계 비즈니스를 시작하면서 시계 사업부를 라쇼드퐁과 르로클에 둔 브랜드도 많다. 이들은 스위스 메이드의 정통성을 위해 시계 제조의 심장부인 라쇼드퐁과 르로클을 선택한 것이다. 라쇼드퐁과 르로클은 그 자체로 스위스 시계의 정통성이기 때문이다.
세계 최대 규모의 시계 박물관이 있고, 자케 드로와브레게, 투르비용이라는 이름의 거리가 있으며, 도시 곳곳에서 마주하는 간판이 모두 시계 브랜드 이름뿐인 라쇼드퐁과 르로클의 자세한 이야기는 111월호에서 다시 만나보자.
사진제공 스위스정부관광청 www.MySwitzerlan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