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10.05 15:48

아파트 옥상에 아침에 빨아 널어 논 이불 빨래를 걷으러 올랐다. 내 발소리에 놀랐는지 빨랫줄 한 쪽에 앉아 졸던 잠자리 한 마리가 놀라 날아오른다. 그 바람에 나도 덩달아 놀라 발걸음을 멈추었는데 잠자리는 뒤도 안 돌아보고 날아가 버린다.

빨랫줄에 널어놓은 이불을 걷으려다가 이불에 얼굴을 묻는다. 이불에서 따사롭고 포근한 햇살 냄새가 난다. 가을 냄새가 난다. 다시 이불에 코를 묻고 숨을 깊이들이 마신다. 코로 가슴으로 스며드는 햇살 냄새에 행복감이 온몸으로 퍼져 나간다. 하루의 피로가 스르르 풀어진다. 내 마음도 덩달아 따뜻하고 부드러워진다.

유년의 집 마당에는 빨랫줄이 있었다. 감나무에 묶인 빨랫줄이 마당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대문의 기둥에 박아놓은 대못에 매여 있었다. 주황빛 나일론 빨랫줄에는 늘 색색의 옷가지가 널려 있었다. 널려있는 옷가지들은 모여드는 햇살과 지나가는 바람들과 사르락사르락 거리며 놀았다.

[시니어 에세이] 바지랑대

그 빨랫줄에는 으레 한가운데 바지랑대가 서 있었다. 이불 홑청이라도 빨아 너는 날에는 무게를 이기지 못한 빨랫줄이 축 늘어져 땅바닥에 끌렸다. 그러면 엄마는 한쪽 끝이 브이 자로 벌어진 곳에 빨랫줄을 끼운 긴 장대를 곧추세워 하늘을 찌를 듯 세워 놓곤 했다. 그 긴 장대를 ‘바지랑대’ 라고 불렀다. 빨래가 바람에 춤이라 추면 바지랑대는 빨래가 움직일 때마다 같이 흔들리며 중심을 잡느라 애를 썼다.

바지랑대는 누군가의 쉼터가 되곤 했다. 바지랑대 끝에는 뭉게구름이 걸려 쉬었다 가고 빨간 고추잠자리가 쉬어가는 쉼터였다. 나는 늘 그 바지랑대 끝에 앉았다 떠나는 뭉게구름이나 빨간 고추잠자리를 잡고 싶었다. 그러나 내 키로는 어림도 없었다. 어느 날인가는 빨간 고추잠자리 날개를 접고 눈을 감고 자는 것 같았다. 기회는 이때다 싶었다. 발소리를 죽이고 숨소리도 내지 않고 다가갔다. 바지랑대를 살그머니 잡고 천천히 기울이다가 잠자리는 잡지도 못하고 빨래 끝에 흙먼지만 잔뜩 묻혀놓기도 했다.

지난 주말, 일이 있어 시외버스를 타고 가면서 스치는 차창 풍경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분명 정류장도 아닌 곳에 버스는 서고 아주머니 한 분이 올라타셨다. 이 무슨 일인가 싶어 기사님을 보다가 아주머니를 보다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시골집 마당에 내 시선이 머물렀다.

내가 잊고 살았던 것들이 거기 있었다. 솜털처럼 가벼워진 햇살 아래 바지랑대가 가볍게 받쳐 든 빨랫줄이 보였다. 그 빨랫줄에 어린아이 티셔츠 두 장, 바지 두 장과 양말 몇 켤레가 널려 바람 따라 흔들리고 있었다. 높아진 하늘엔 그렇게 잡으려다 잡지 못한 뭉게구름이 유유히 흘러간다. 잠자리 떼가 유유히 날고 있다. 유년 시절, 내가 잡으려다 잡지 못한 것들이 잊힌 것들이 그곳에 머물고 있었다.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 나는 한숨지으며 이야기하겠지요.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가 쓴 시(詩) '가지 않은 길'의 일부다.

나를 비롯한 모든 사람이 자신이 선택한 길을 향해 걸어간다. 그 길이 자기가 원해서 가는 사람도 있고, 형편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 가는 경우도 있다. 나는 후자의 경우다. 긴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내가 하고자 한 일이 아니라고 수도 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이를 운명처럼 받아들였다. 아니 운명을 넘어 세월이 갈수록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젠 내가 누군가의 바지랑대가 되어야 할 때다. 누군가 살다가 지쳤을 때 잠시 쉬어가는 쉼터로 있어야 할 나이다. 그렇다고 가지 않은 길에 회한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가끔은 내 마음대로 일이 풀리지 않을 때면 가지 않은 길을 바라보며 ‘저 길을 걸었다면 더 행복한 삶이 아니었을까?’ 하며 흔들릴 때도 있을 거다. 그럴 때마다 마음속 바지랑대를 찾아 나를 곧추세워야겠지. 하늘을 보니 잠자리가 날아간 푸른 하늘이 한 뼘 더 높아졌다. 가을이 오긴 오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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