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그림의 밑천, 6·25전쟁의 공포"

"제 그림은 저의 인생 역정입니다. 어쩔 수 없이 우리 근현대사의 극한 상황을 경험해 보니 그걸 그림으로 안 그릴 수가 없었습니다."

황용엽(84) 화백이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11일까지 '황용엽: 인간의 길'전을 선보인다. 이번 전시는 한국 현대미술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원로 예술가들을 조명하는 국립현대미술관 현대미술작가 시리즈의 하나로 작가의 예술 세계를 시대별로 보여주는 회고전으로 구성됐다.

작가는 평양 출신으로 평양미술대학에 다니다가 6·25전쟁 통에 삶이 송두리째 흔들렸다. 전쟁 통에 인민군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며 남쪽으로 왔다. 이후 국군에 입대해 전쟁에 참전했다가 오른쪽 다리에 총상을 입어 상이군인이 됐다. 지금도 오른쪽 다리가 왼쪽 다리보다 1.5㎝ 짧다.

작가는 전쟁을 통해 인간의 잔혹함을 대면했다. 그는 "상대방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어야만 하는 극한 순간"이라며 "그때의 좌절과 공포가 내 그림의 밑천"이라고 했다. 1957년 홍익대를 졸업한 뒤,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미술계의 '화단(畵壇) 정치'를 따르지 않고 홀로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해 1989년 '제1회 이중섭 미술상'을 수상했다.

이번 전시에선 '인간'을 주제로 작업한 작가의 대표작 90점. 1950년대 말 작업은 어두운 색상과 거친 붓놀림으로 그려 사람이라고는 쉽게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색상이 밝아지며 사람의 모습도 구체적으로 형상화했다. 1990년대엔 색과 붓놀림으로만 가득 찼던 작품에 평화로운 평양 시골 고향 풍경을 배경으로 담았다. 방울, 지팡이 등을 잡은 사람들을 그려 한국의 무속 신앙과 연결했다.

이번 전시가 화가로서 마지막 전시라고 한 황용엽은 "작업은 계속 하겠지만 이 나이에 혼자서 개인전을 꾸리는 건 힘이 들어 조용히 정리를 하려 한다"고 했다. "작업을 하다 보면 힘든 게 더 많아요. 즐거워서 그린 적이 없다는 뜻이에요. 하지만 내 말들의 기록이란 생각에 평생 붓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02)2188-6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