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10.12 10:42

바람 색깔이 달라졌다. 아침저녁이면 옷깃을 나도 모르게 여민다. 아침, 집 앞에 있는 둘레길을 걷는다. 어디서부터인가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아마도 또 누군가 둘레길을 음악을 들으며 걷는 모양이다. 음악은 멀리서부터 점점 가까이오더니 마침내 내 곁을 스치다 멀어져 간다.

‘곡목이 뭐지?’ 기억이 안 난다. 아무리 생각해도 귀에 익은 음악인데 그냥 모르는 대로 그 음악의 리듬에 맞추어 흥얼거리는데 나도 모르게 슬며시 입속에서 노래가 흘러나온다.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그랬다. 그 노래는 이동원이 부른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였다.

숲이 변하고 있다. 매미, 잠자리 등 여름을 즐기던 곤충들이 하나둘 자취를 감추고 그 자리에 가을을 노래하는 풀벌레 소리가 들어서고 가을바람이 분다. 가을바람이 여름의 눅눅하고 뜨거웠던 잔영을 몰아내고 있다. 한 계절이 보내고 또 다른 계절을 데리고 오는 것이다.

[시니어 에세이] 변화의 바람

별로 높지도 않은 동네 산 둘레길을 걷는 사람들의 옷차림도 변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짧은 소매가 주류를 이루더니 요즘은 하나둘 긴소매 옷을 입고 걷는 사람들이 늘었다. 그뿐이 아니다. 슬며시 묘한 바람이 불고 있다. 사람들의 옷차림이 달라지고 있다. 등산복 일색이던 둘레길에 평상복 바람이 일고 있는 것이다. 히말라야 산봉우리라도 오를 것처럼 낮은 둘레길에 등산복으로 머리에서 발끝까지 완전무장하고 스틱까지 짚고 걷는 사람이 하나둘 자취를 감추고 있다.

얼마 전에 홋카이도에 간 적이 있다. 해외 토픽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유별남 등산복 사랑이 나갔었다는 얘기에 그냥 간편한 평상복 차림으로 갔다. 그곳에서 만난 가이드가 버스에 오르자마자 고맙다고 고개를 숙인다. 이유는 단 하나, 알프스 산이라도 오를 것처럼 완벽한 등산복 일색으로 오는 우리나라 여행객 때문에 그동안 너무 창피했었는데 그러지 않았다고 고맙단다.

그렇다. 전 세계를 다 살펴봐도 우리나라 사람처럼 등산복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없다. 고가(高價)의 마케팅에 현혹되어 하나둘 입기 시작하더니 어느 틈엔가 우리 생활 깊숙이 들어앉아 등산복이 평상복이 되어 하다 못 해 결혼식장까지 입고 나타나는 사람이 있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런 등산복 사랑이 변화의 바람을 맞고 있다. 요즘은 사랑은 변하는 거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지만 과연 우리나라 사람들의 유별난 등산복 사랑이 사라질지는 좀 더 지켜볼 일이다. 과연 이 미미한 바람이 거센 광풍이 되어 등산복 바람을 소멸시켜 갈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새로운 패션이 되어 등장할 것인지 나도 궁금하다.

혹시 아는가. 제2의 청바지가 될지. 청바지는 샌프란시스코 광부들의 작업복이었다. 그 당시 험한 일을 하는 광부들에겐 빨리 해어지지 않는 바지가 필요했다. 그것에 착안한 리바이 스트라우스가 재고로 쌓여있던 텐트 천을 사용해 만든 것이 오늘날 청바지의 시작이다. 그 청바지가 1970년대 히피문화의 일환으로 등장했다. 60년대의 과속 성장을 반성하듯 히피들은 겸손의 의미로 청바지를 찢고 삶 속에 다양성을 포용하자는 뜻으로 다른 빛깔의 천을 덧대었다. 80년대엔 가수 마돈나가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성모(Madonna)를 노래했다. 보수(保守) 쪽에서 보면 해괴하기 짝이 없다.

청바지 문화가 이 땅에 들어왔을 때 얼마나 많은 어른이 손가락질했는가. 찢어진 청바지 입고 기타 치는 것이 기성세대에게 예쁘게 보이지 않았다. 공부 안 하고 노는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보였을 테니 당연했다. 마치 청바지를 입으면 다 불량한 사람이 된 것처럼 수군대고 질타했다. 심한 사람들은 나라가 망해 간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남녀노소 누구나 즐겨 입는 평상복으로 발전했다. 그것처럼 등산복도 그렇게 되지 말란 법도 없지 않은가.

천천히 기다려 볼 일이다. 이 등산복 광풍이 어디로 어떻게 방향을 틀어나갈지. 예전의 새마을 운동이 한참일 무렵 거세게 불어치던 운동복 차림의 광풍이 슬며시 사라진 것처럼 사라질는지, 아니면 청바지처럼 끈질기게 살아남아 또 다른 영역을 구축해 나갈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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