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 봉사단체 늘수록 統一 앞당겨질 것"

유진벨재단은 북한에서 가장 심각한 보건 문제인 결핵 퇴치를 돕는 민간단체다. 지난 20년간 남북 관계에는 숱한 부침(浮沈)이 있었다. 하지만 유진벨재단은 1995년 설립 이래 북으로 물자를 보내지 못한 적이 없다. 이런 안정적인 교류 유지에는 스테판 린턴(65·한국명 인세반) 회장의 역할이 컸다. 린턴 회장은 내일(16일) '백남상'을 받는다. 한양대 설립자인 백남 김연준(1914~2008) 박사를 기려 제정한 상이다. 방북을 며칠 앞두고 환자들에게 전할 약품을 챙기고 있던 린턴 회장을 경기 안양 유진벨재단에서 만났다.

그는 막힘없이 대북 지원 활동을 해온 비결(秘訣)에 대해 "꿈이 작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대북 지원을 하면서 '통일을 위한 교섭 통로가 되겠다'거나 속으로 '내 이름을 알려 출마하겠다'는 식의 꿈을 꾸는 사람이 많아요. 저는 결핵 퇴치라는 부름에 만족하고 집중했을 뿐입니다. 북한 주민과의 신뢰도 그래서 자연스럽게 생겼죠."

유진벨재단은 평양·개성·남포와 평안도·황해도 등 12곳에 있는 일반 결핵요양소를 '다제(多劑)내성결핵 요양소'로 지정해 환자 1200명을 치료하고 있다. 6개월마다 회장을 포함한 방북단 10여 명이 3주간 북한에 머물지만 너무 짧다고 한다. "21일간 12개 요양소를 다 찾아다닙니다. 새 환자를 검사해 입원시키고 기존 환자가 얼마나 호전됐는지 확인하고 약을 직접 전하죠."

이런 관리 덕에 여러 약에 내성이 생겨 치료하기 어려워진 다제내성 환자 완치율이 76%에 달한다. 세계 평균이 45%임을 감안하면 대단한 성과다. 북한 주민 사이에선 '결핵 치료에 실패해도 유진벨 요양소에 가면 희망이 있다'는 말이 돌 정도다. 결연 후원자들이 마련해 재단이 전달하는 결핵약 상자에는 '유진벨재단'이라는 글자가 없다. 대신 큼지막하게 후원자 이름이 적혀있다. 린턴 회장은 "집배원이 배달하면서 발송자 이름을 지우고 자기 이름을 쓸 순 없는 것 아니냐"며 "우리는 심부름하는 단체이고, 나는 심부름꾼에 불과하다"고 했다.

후원받는 북한 주민들도 남한 사람들이 지원해준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린턴회장은 생색내거나 자유민주주의의 우월성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일부에선 '오랫동안 북한과 자유롭게 접촉해왔는데 왜 그 통로를 활용해 메시지를 전파하지 않느냐'고 답답해해요. 제가 20년 동안 주로 해온 일이 그걸 막는 것이었어요. 환자 치료에 전념하지 않고 이데올로기 전파에 앞장섰다면 얼마 가지 못했을 겁니다."

그는 선교사 부모를 따라 네 살 때 한국에 와 전남 순천에서 살았다. '유진 벨'은 그의 진외조부(할머니의 아버지)로, 1895년 미국에서 한반도로 건너와 선교와 교육 활동을 한 인물이다. 할아버지(윌리엄 린턴)와 아버지(휴 린턴)도 한국에서 교육과 의료봉사를 했다.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 총재인 인요한 연세대 의대 교수가 그의 동생이다. 1995년 유진벨재단을 설립해 대북 식량 지원을 시작한 그는 1997년부터는 북의 요청으로 결핵 치료에 집중하고 있다. "어릴 때부터 한국에서 살았지만 외모가 너무 달라 내가 한국인이라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 대신 한국을 '내게 주어진 환경'으로 받아들였어요. 환경도 일종의 '부름'이지요."

그는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남북한 이데올로기까지 공부하고 80회나 북한을 오간 '북한통(通)'이지만 결핵 얘기가 아니면 말을 아꼈다. 그동안 언론 인터뷰도 거의 하지 않았다. "일부러 피한 건 아닙니다. 환자 치료에 도움될 것 같지 않으면 응하지 않았을 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