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10.22 13:37

이른 아침 아파트를 나와 천천히 오솔길로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지난 밤 깨다 자다를 반복하며 멍해진 머릿속을 맑은 공기로 헹구어 낸다. 골짜기에 놓인 나무다리를 건너는데 삐걱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다들 그렇게 조금씩 삐걱 거리며 살아가는 거라고 밤잠을 설친 내게 위로를 보낸다.

산모퉁이를 돌아서는데 벌써 산책을 끝내고 돌아가는 젊은 할머니 두 분과 마주친다. 간혹 마주치는 분들이라 눈인사를 건네고 스치는 순간 들리는 소리. “요새는 말이야. 아들이 출가외인(出嫁外人)이야. 그러니….”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는다. 그 다음 소리야 안 들어도 뻔하다.

우리말에 출가외인(出嫁外人)이라는 말이 있다. 국어사전에 보면 ‘시집간 딸은 남이나 다름없다’는 뜻으로 이르는 말이다. 예전에는 여자가 시집을 가서 시집살이를 했다. 시집살이란 시집에서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그 시집에서 살던 사람들의 텃세는 가히 하늘을 찔렀다. 그 제일 앞에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있었다. 아무리 막강한 친정이라도 시집 앞에만 서면 고개를 숙여야 했다. 오죽하면 '처가와 화장실은 멀수록 좋다'는 말도 있었다.

▲KBS 드라마 가족을 지켜라 캡쳐
▲KBS 드라마 가족을 지켜라 캡쳐

그 멀기만 했던 화장실은 집안으로 들어왔고, 처가는 점점 더 가까워져 자진해서 처가살이하는 남자들도 늘어나는 세상이다. 바야흐로 남녀평등시대를 거쳐 여자 선호사상이 고개를 들고 있다. 아들에 빗댄 우스갯소리들이 괜한 소리가 아님을 우리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젠 한술 더 떠서 아들이 출가외인(出嫁外人) 시대가 도래한 모양이다.

지금 스치며 들은 소리로는 요즘은 ‘출가외인’이 딸이 아니라 아들이라는 말이다. 아들이 딸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가족에게 살갑지 못한 아들의 태도 때문에 빚어진 현상이기도 하겠지만 그만큼 여자들의 지위가 높아지기는 했다. 그렇지만 ‘출가외인(出嫁外人)’이란 말이 아들에게 적용된다는 현실을 어찌 받아들여야 하는지 참으로 난감하다.

문득 지인들 모임에서 들은 이야기가 생각난다. 아들만 둘 키운 K가 있다. 언젠가 그는 ‘요즘은 내가 자식이 있긴 있는지 의심스러워. 두 아들 안부 전화 한 통 받기도 힘든데, 큰아들이 언젠가 와서 자기도 모르게 그러더라. 장모님하고 외식을 어디서 했는데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어쩜 그리 즐거워하는지….’ 그리곤 ‘엄마도 한 번 갈래요?’ 하면서 며느리 눈치를 보더라고 쓸쓸히 웃었다.

사회학자들은 이것을 신모계사회(新母系社會)의 출현이라고 말하는 모양이다. 많은 남자 특히 장년층 이상의 남자들에겐 거부감이 들 수 있지만 최근 우리 사회는 신모계사회(新母系社會)로 가는 것을 아니라고 우길 수도 없는 모양새로 흐르고 있다. 연하 남자와 연상 여자의 결혼도 이제는 평범해지고, 신혼집은 대부분 시댁보다는 친정이 가깝다. ‘아들은 사춘기가 되면 남남이요, 군대 가면 손님, 장가가면 사돈이라더니, 애 낳으면 동포’란다. 기러기 아빠는 있어도 기러기 엄마는 없다. 남자가 주부 역할을 해도 하나도 이상하게 보는 사람이 없는 세상이다.

그것을 우리는 남녀평등(男女平等)이라 한다. 나쁠 것은 없다. 남녀가 평등하고 아들과 딸의 차별이 없다고 하는 시대라면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그렇다면 시가와 처가의 관계도 서로 평등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결혼한 부부에게 처가와 시가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곳이다. 사는 형편에 따라 시가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처가의 도움을 받아야 할 때도 있다. 그 반대로 자녀들의 상황에 따라 노후에 딸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아들의 도움을 받기도 하는 시대에 사는 우리다. 이것이 진정한 이 시대의 남녀평등(男女平等)이라 생각한다.

아침 산책길이 내내 씁쓸하다. 듣지 말아야 할 이야기를 듣고는 씁쓸한 것은 나도 어쩔 수 없는 아들을 가진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출가외인(出嫁外人)이란 말에 상처를 입지 말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아들들이 당당하게 아들다움을 잃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딸을 가진 어머니들도 마찬가지일 게다. 딸들이 딸답게 당당하게 사는 것을 바라볼 때 가장 행복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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