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하지 않은 은은한 향이 입안을 정화한다. 과하지 않고 부족하지 않아 가슴으로 느끼게 하는 전통차가 지니고 있는 깊이감이다.
“연잎 차인가요?
“네, 연꽃잎 차에요. 연 잎차보다 향이 더 진하지요.”
연잎처럼 고운 한복을 입은 중년 여인의 말이 연꽃 향처럼 가을바람에 소슬거린다. 동양의 전통 차 예법은 정(靜)이라는 단어를 주체로 한다. 움직임 없이 찻잔을 손으로 감싸고 따라준다. 찻잔에 원하는 만큼의 찻물을 따라 마신 후 입안에 남아있는 차향의 느낌을 그대로 지닌 채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곳이 있다. 국악원의 매월 마지막 수요일 오전 열한 시 공연 다담! 차와 담소를 의미하는 다담의 시간을 나는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다담지기 정은아의 자기관리와 진행이 즐거움의 하나이며 초대 손님의 깊이 있는 시선에서 배우는 삶의 모습들이 신선함으로 다가온다. 또 하나의 즐거움을 누리게 하는 매력이 국악과 현대음악으로 이루어가는 아름다운 조화의 창작공연이다.
밴드 919-23의 공연이 시작된다. 현대복장으로 정장 차림을 한 젊은 청년들의 국악연주는 신비감을 증폭시키고 있다. 다담지기 정은아 씨의 표현처럼 007가방과 권총 하나 들고 있으면 어울릴 것 같은 모습의 국악연주가 의외의 느낌을 전달한다. 아쟁 그리고 전자기타의 조화로운 연주가 인상 깊다. 다시 듣고 싶다는 열망으로 핸드폰으로 녹음을 유도했다.
한국음악과 서양음악을 전공하며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음악가들이 모여 함께 음악을 시작하였다는 의미로 그들의 연습실 주소인 919-23을 팀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는 젊은 음악가들의 단체이다. 연주가 끝난 후 만나게 되는 초대 손님 이한우(조선일보 문화부 부장)님과 다담지기의 매끄러운 진행은 자극적인 시대에서 향기로운 차를 마주하고 만나는 반가운 손님이 되어준다.
국악과 현대가 이루어가는 무대의 연주는 잊혀간 역사를 향하는 그리움으로 우리를 마주하고 있었다. 추정으로만 가능한 우리가 하나씩 풀어가야 하는 비밀의 시간이었다. 어긋나서 상처 난 역사가 멍울 빛으로 그리고 비밀스러운 감정의 만남으로 그것들을 새롭게 풀어가는 역사가의 시선으로 미리 찾아온 늦가을 손님이 되어준다. 우리 악기와 현대 악기가 함께 풀어내는 깊은 가을 소리에 담긴 젊음의 열정과 그들만의 비밀스러운 감정의 공감을 함께하던 시간이 몇 알의 알약보다 훨씬 더 깊이 있는 치유의 시간이 되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