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이다. 가을 냄새가 짙다. 문득 쳐다본 하늘에 고추잠자리 한 마리가 유유히 날고 있다. 저 잠자리를 보며 유유히 떠나고 싶다고 하던 소녀가 있었다. 사는 곳이 너무 좁아 대처로 나가고 싶은 꿈을 늘 가지고 살았다. 마루 끝에 걸터앉으면 보이는 산마루에 슬프도록 고운 저물녘의 하늘을 보면 어디선가 누가 날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금방이라도 해진 운동화를 신고 떠나고 싶었다.
그 막연한 그리움을 난 아직도 가지고 산다. 아파트 앞 야산에서 어둠이 슬금슬금 내려오기 시작하면 부엌창문에 어렸을 적 보았던 슬프도록 고운 저물녘의 하늘이 찾아들고 난 막막한 그리움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 옛날 그리움이 막연한 그리움이었다면 요즘 찾아드는 그리움은 그래도 실체가 좀 있는 그리움으로 바뀌어 있다.
주홍빛으로 감나무잎이 물들어 갈 때쯤, 초등학교 가을 하늘에서 펄럭이던 만국기. 하얀 깃털이 달린 화려한 부채 두 개를 양손에 쥐고 한복 자락을 펄럭이며 빙빙 돌던 부채춤. 학교 가는 길가에 알록달록 피어 가을바람에 흔들리던 코스모스들. 이제는 기억의 창고에서 한낱 흑백 사진의 그리움으로 남아 흑백 풍경화가 되었다.
산 아래 좁은 골목길, 산비탈에 꿈결처럼 피어났던 하얀 구절초와 연보랏빛 쑥부쟁이, 노랗게 피었던 들국화까지 그때 그 자리에서 시가 되어 나에게 왔다. 그 꿈결 같은 풍경은 이제 그리움으로 남았다. 그 때문일까. 아파트 옥상 한쪽에서 기르는 들꽃 속에서 올해도 어김없이 연보랏빛 쑥부쟁이가 피었다. 도시 한복판에서 쑥부쟁이 꽃을 기를 수 있다니 행운도 이런 행운이 없다. 여기가 아닌 다른 아파트에 살았더라면 이 쑥부쟁이 꽃을 어찌 해마다 가슴속에 가득 들여놓을 수 있었을까.
새벽녘 잠결에 들려오던 ‘부사우 사려, 부새우 사려’ 경포호에서 갓 잡은 부새우를 물동이에 이고 어스름 새벽에 골목을 누비고 다니는 아낙네의 소리. 그날 아침 밥상엔 어김없이 고춧가루 깨소금 솔솔 뿌려 밥솥에서 찐 부새우찜이 올라왔다. 짭조름하고 고소했던 그 맛. 딸랑딸랑 소리 따라온 고소하고 담백한 초당 두부.
산 그림자 슬금슬금 내려와 마당으로 마루로 기어오를 때면, 이 집 저 집 굴뚝에서 피어오르던 저녁 연기. 부엌 화로에서 보글보글 끓어오르던 구수한 된장찌개. 흙 부뚜막에서 윤기 자르르 흐르던 가마솥. 뒤꼍에 가지런히 놓여있던 엄마의 장독대. 급하면 우리 매타작에 나섰던 빗자루며 할머니가 혼수로 만들어 주었다던 투박한 함지박. 이 모든 것이 이제는 서사시가 되어 내 가슴속에 내 고향 강릉의 그리움으로 산다.
이렇게 그리울 줄 알았다면 한두 가지쯤은 가져와도 좋았을 것을. 그리움의 무게가 너무 클 것이라는 것을 알아서일까. 그냥 보내버리고 싶어서였을까. 아니면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이 들어 챙기지 못한 탓일까. 그 어떤 것이 이유라도 변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 너무도 익숙한 풍경이었기에 언제나 그곳에 가면 그때 그 자리에 있을 거라는 착각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하였다.
부엌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가을 노을이 오늘따라 너무도 곱다. 그리움이 노을 속에 들어 밀물처럼 밀려온다. 젊을 때는 생각지도 못한 그리움이다.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애틋한 세월의 그리움이 나이만큼 자라 있다.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그리운 것들. 대답 없는 그것들을 목청껏 불러본다.
그리움 속에는 그 사람도 산다. 산을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어느 날 홀연히 산으로 가버린 사람. 갈 때도 제멋대로 가버리더니 올 때도 제멋대로 오려는지 연락 한 번 없다. 아예 산에서 살려는 것인지 불러도 대답이 없다. 대답이 없으니 나라도 찾아 나설 밖에. 그가 나에게 주었던 쑥부쟁이 꽃 한 다발을 들고 내가 산으로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