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가 인정한 시계 마을 라쇼드퐁 & 르로클Ⅱ

  • 이은경 시계 컨설턴트

입력 : 2015.10.29 17:42

이은경의 시계여행

16세기 제네바에서 시작된 스위스 시계 산업은 쥐라 산맥의 가장 깊은 골짜기 마을 라쇼드퐁과 르로클에 이르러 꽃을 피웠다. 전 세계에서 가장 시계 산업이 발달한 도시, 시계 산업 없이는 설명할 수 없는 도시, 라쇼드퐁과 르로클로 들어가보자.

만약 누군가가 라쇼드퐁이라는 작은 도시를 찾는다면 그 이유는 시계 때문이라기보다는 르 코르뷔지에라는 세계적인 건축가 때문일 수 있다. 건축학도나 건축 관련 일을 하는 사람, 그리고 건축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르 코르뷔지에는 매우 유명한 건축가다. 마치 시계애호가들이 생각하는 아브라함 루이 브레게처럼 말이다. 스위스 라쇼드퐁은 르 코르뷔지에의 고향이다. 그가 태어난 곳부터 그가 설계한 건축물을 보기 위해 사람들은 라쇼드퐁을 찾는다. 그러나 라쇼드퐁은 결코 건축학도만이 찾아가야 할 성지는 아니다. 시계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꼭 한 번 이상은 찾아가야 하는 성지와도 같은 곳이고, 그곳에서 꼭 성지 순례를 해야 한다.


대형 화재 후 새롭게 태어난 도시, 라쇼드퐁

▲라쇼드퐁 시내 풍경. 자연광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 건물이 모두 한 방향으로 되어 있다.
▲라쇼드퐁 시내 풍경. 자연광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 건물이 모두 한 방향으로 되어 있다. /La Chaux-de-Fonds 스위스정부관광청

시계애호가의 성지 순례 코스는 라쇼드퐁에 위치한 국제 시계 박물관에서 시작된다. 라쇼드퐁 기차역에서 나와 오른쪽으로 5분 정도 가면 4천 개 이상의 시계가 모여 있는 국제 시계 박물관이 나온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시계가 전시되어 있는 이곳은 스위스 패스가 있다면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 다른 박물관과 다르게 마음껏 사진도 찍을 수 있다. 입구에 진열되어 있는 수십 개의 중세시대의 종탑시계 내부 장치들부터 수백 개의 탁상시계를 모아놓은 벽면 등 곳곳이 시계애호가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클래식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티쏘의 샤민 데 트럴 듀오(Tissot Chemin des Tourelles Duo).
▲클래식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티쏘의 샤민 데 트럴 듀오(Tissot Chemin des Tourelles Duo).

국제 시계 박물관을 나오면 자케 드로의 길이 나온다. 18세기 오토마톤을 제작한 유명 시계 제작자 피에르 자케드로의 이름을 그대로 본뜬 자케 드로의 길에는 라쇼드퐁 도시 박물관이 있다. 18세기 도시에서 일어난 대형 화재로 인해 도시 자체를 시계 제조에 최적화하여 재설계한 이야기를 담은 15분 정도의 영상을 보고 있노라면 라쇼드퐁이라는 곳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만약 시계 제조에 최적화된 도시의 모습을 한눈에 보고 싶다면 라쇼드퐁 관광안내소가 있는 에스파시테(Espacite) 타워에 오르면 된다. 구시가지를 바라볼 수 있는 파노라마가 펼쳐지며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르로클에 위치한 시계 박물관 샤토 데 몽(Chateau des Monts).
▲르로클에 위치한 시계 박물관 샤토 데 몽(Chateau des Monts). /LeLocle 스위스정부관광청 제공

태그호이어, 디올, 루이비통 등 LVMH 산하 시계 브랜드의 시계 제조 공방들은 서로 밀집해 있으며, 브라이틀링, 샤넬 같은 브랜드도 모두 라쇼드퐁 안에 자리해 있다. 르로클로 향하는 기차를 타고 가다보면 대로변에서 까르띠에, 파텍 필립, 자케 드로의 매뉴팩처를 볼 수 있다. 특히 투명유리로 설계된 까르띠에 매뉴팩처는 소나무로 둘러싸인 3만m²에 달하는 푸른 들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제품의 개발과 생산, 고객 서비스라는 3개 분야를 주축으로 하여 세부적으로는 175개 부문의 시계 제조 기술이 집결되어 있다. 까르띠에는 이러한 모든 과정을 이 한곳에 집결시킴으로써 생산 전 공정에 대한 통일성 있는 감독이 이루어지도록 했다.

▲르로클의 몽블랑 본사 전경.
▲르로클의 몽블랑 본사 전경.

시계 제조 도시답게 라쇼드퐁에서는 시계 제작을 체험해보는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미리 예약을 하고 간다면 하루 코스 또는 2일의 스페셜 코스 등 다양하게 경험할 수 있다.


작고 고풍스러운 도시, 르로클

▲엘 프리메로 크로노마스터 1969(El Primero Chronomaster 1969). 세 개의 카운터를 각기 다른 컬러로 표현해 주목받은 제니스의 DNA를 고스란히 간직했다.
▲엘 프리메로 크로노마스터 1969(El Primero Chronomaster 1969). 세 개의 카운터를 각기 다른 컬러로 표현해 주목받은 제니스의 DNA를 고스란히 간직했다.

르로클은 라쇼드퐁에서 기차로는 10분, 버스로는 20분 정도가 걸린다. 라쇼드퐁과 르로클이 모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지만 분위기는 르로클이 더 고풍스럽다. 르로클에도 샤토 데 몽(Chateau des Monts)이라는 시계 박물관이 있다. 규모 면에서는 라쇼드퐁 국제 시계 박물관보다 작지만 컬렉션은 매우 훌륭한 편이다.

▲제니스 창업주인 조르주 파브르 자코.
▲제니스 창업주인 조르주 파브르 자코.
제니스, 장 리샤르, 티쏘, 율리스 나르덴 등 르로클에도 유규한 역사를 가진 정통 시계 브랜드의 본사가 자리해 있다. 1665년에 스위스 라쇼드퐁과 르로클 사이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워치 메이커 장 리샤르는 1681년 첫 시계를 만들며 워크숍을 설립했다. 직접 시계 제조를 위한 도구를 제작할 정도로 뛰어난 워치 메이커였던 장 리샤르 덕분에 라쇼드퐁과 르로클이 세계적인 시계 제조 도시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이를 기념해 르로클에는 그의 동상에 세워져 있다. 장 리샤르는 2012년 케링 그룹의 후원으로 리론칭했다.

▲라쇼드퐁에 위치한 브라이틀링 매뉴팩처.
▲라쇼드퐁에 위치한 브라이틀링 매뉴팩처.
올해 창립 150주년을 맞은 제니스의 역사는 시계 제조가 아닌 무브먼트 제조부터 시작되었다. 여러 명의 장인이 한 지붕 아래에서 함께 작업하는 시스템을 처음 적용, 최고의 무브먼트를 생산하기 시작한 시계 장인의 이름은 바로 조르주 파브르 자코, 제니스의 창업자다. 당시 그가 세운 제니스 공방은 르로클의 다른 시계 제조 공방과 마찬가지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1853년 설립된 티쏘는 르로클을 지키고 있는 또 다른 대표적인 브랜드다. 브랜드의 가장 클래식한 컬렉션의 이름도 바로 ‘르로클’이다. 올해에는 1907년 설립한 공방이 있던 르로클의 거리 이름을 사용한 ‘슈망 데 투렐’이라는 컬렉션을 론칭했다. 18세기 이후 마린 크로노미터를 제작하며 시계 제조 기술을 발전시켜온 율리스 나르덴은 시계 다이얼에 ‘르로클’이라는 글씨를 새겨 넣는다. 브랜드가 탄생한 곳, 워치 메이킹의 정통성을 나타내기 위해서다.
▲라쇼드퐁의 하늘 아래 까르띠에 깃발이 휘날리고 있다.
▲라쇼드퐁의 하늘 아래 까르띠에 깃발이 휘날리고 있다.
‘시계 제조’라는 단일 산업을 수백 년 동안 이어온 것을 보존해야 할 가치로 인정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시계 도시 르로클과 라쇼드퐁은 그 자체로 스위스 시계 산업을 대표한다. 알프스 산맥의 아름다움과 루체른과 베른 같은 오래된 도시의 아름다운 구시가지를 보기 위해 스위스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진정한 시계애호가라면 쥐라 산맥 해발 1000미터에 자리 잡은 시계 마을에 꼭 방문해보길 권한다.


사진제공 스위스정부관광청 www.MySwitzerlan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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