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11.09 16:31

가을날 저녁 무렵의 산자락 노을이 곱다. 그 노을 속에 이제 막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는 가을 잎들이 너울댄다. 그 숲을 걸어 들어가며 난 아까부터 혼자 실실 웃고 있다. 누구라도 곁에 있으면 아마도 입을 열지 않고는 못 배겼을 것이다. 아니지. 정확히 말하면 그냥 가슴 속에 묻어 놓고 나 혼자 지금처럼 즐기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휴대전화를 손에 쥐고 있으면서도 누군가에게 걸지 않는 걸 보면 후자가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어린 다람쥐 한 마리가 길섶에서 나를 쳐다보더니 쪼르르 오솔길을 가로질러 숲으로 들어 가 버린다. 그 자리에 길이 두 갈래로 갈라져 있다. 한 길을 내가 산책을 나오면 늘 걷는 둘레길이고 또 한쪽은 산등성이까지 계단으로 이어져 있는 길이다. 무릎도 가끔은 아픈 터라 되도록 가지 않았던 길이다. 어찌할까 잠시 망설이다가 오늘은 산을 오르기로 했다. 저리도 고운 노을을 제대로 봐야지 싶었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 생각난다. 우리 시대에 많이 암송되기도 했던 이 시(詩)는 20세기 미국의 국민시인 프로스트가 20대 중반에 쓴 시라고 한다. 그 당시도 지금의 우리나라처럼 젊은이들이 변변한 직장을 갖기가 힘들었던 모양이다. 당시 변변한 직업도 없고 문단에서도 인정받지 못한 데다 기관지 계통의 질병에 시달리고 있었던 로버트 프로스트는 그의 집 앞에는 숲으로 이어지는 두 갈래 길이 있어 그 길과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며 이 시를 썼다고 한다.

[시니어 에세이] 가지 않았던 길

살아오는 동안 가지 않았던 길. 그 길을 요즘 가고 있다. 육십을 훌쩍 넘어서야 퇴직을 하고는 가지 않은 길을 가고 있다. 연극 동아리에 들어갔다고 했더니 친구들이나 식구들이 무슨 생뚱맞은 일이냐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사실 나뿐만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도 때로는 가보고 싶기도 하지만 선뜻 나서지 못하는 길들이 누구에게나 있다. 내게는 이 길이 그 가지 않은 길 중의 하나다. 요즘이야 아이들이 너도나도 가겠다고 하는 길이지만 내가 크는 그 당시에는 딴따라로 불리며 무시 받는 길이었으니 나부터 입 밖에 내는 것만으로도 집 안 망해 먹을 일이라고 했을 길이다.

그런 내가 요즘 연극에 빠져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뮤지컬이다. 공연을 코앞에 두고 이제 막바지 연습에 한창이다. 모두 조금은 긴장되고 조금은 들뜬 모습으로 연습에 빠져 있다. 이야기 줄거리야 당연히 우리가 지나온 날들이다. 한 여고생이 파월장병과 펜팔을 하다가 만나고 결혼을 했다. 결혼했으니 당연히 다시 중동으로 돈 벌러 떠나고 아줌마가 된 그 여고생은 남편이 벌어 보내주는 돈으로 재봉틀을 사서 양장점을 내는 이야기다.

나는 거기서 발랑 까진 꼬마로 나온다. 그 여고생과 월남에서 돌아온 군인 아저씨가 만나는 장면을 만들어주는 역이다. 편지 심부름해달라는 그 군인의 말을 빤히 쳐다보며 거절하다가 돈 십 원에 신나라 연애편지를 전달하는 돈 좋아하는 꼬마 역이다. 처음엔 싫었다. ‘에이 여고생 역이나 주지.’ 했는데 제법 많은 분량에다 같이 연극을 하는 분들이 연습 때마다 잘한다고 칭찬하니 저절로 으쓱댄다.

오늘만 해도 그렇다. 군인 아저씨가 월남에서 제대하고 그 여고생을 만나러 온 장면이다. 청바지에 한껏 멋을 낸 아저씨가 연애편지 전해 줄 사람을 찾고 있는 찰나 내가 막대 사탕을 들고 동요 ‘고기잡이’라는 노래를 부르며 등장했다. 내가 왜 아저씨 심부름하느냐고 하다가 십 원짜리 한 장 받아들고는 신 나게 뛰어가 전달하고 들어오니 사람들이 엄지를 치켜든다. 굳이 자랑하자면 연극 연습에 들어가 아직 재연습을 해보지 않았으니 소질은 좀 있는 모양인가 싶다.

살면서 이쪽 길을 가끔 바라볼 때는 비밀의 정원처럼 신비로움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러다 어쩌다가 이 연극 동아리에 들어왔고 시간이나 보내자는 심정으로 하고 있었다. 연극 공연을 한다기에 뒤쪽에서 잠시 어슬렁대다 사라지는 그런 역할이었으면 했다. 그때는 대중 앞에서 연극을 한다는 것에 약간 겁을 먹었었다. 그런 것이 지금은 3막에서 중심인물이 됐다. 어색함도 없다. 조금 흥분되긴 해도 두근거림도 없다. 겁이 없는 건지 뭘 모르는 건지 모르지만 재밌다.

인생은 수많은 선택이 있다. 그 선택 하나하나가 작은 길이다. 그 작은 길들이 모여 인생이 된다. 분명한 것은 가고 싶다고 다 갈 수는 없다. 그러니 내가 선택 한 길에 만족할 때도 있겠지만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으로 남아 ‘그때 그렇게 했더라면...’ 하고 돌아다 볼지도 모르겠다. 그런 아쉬움을 만들지 않기 위해 퇴직하면서 버킷리스트를 작성했었다. 빼곡히 적혀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지워가며 살기로 했다.

연극 해보기는 그중의 하나였다. 적으면서도 이게 될까? 나도 의아스러웠던 일이었다. 혼자 하는 일이라면 어찌 되겠지만 여럿이 하는 것이라 가망 없다는 걸 알면서도 적었었다. 그리고 꿈결같이 기회가 왔다. 비록 연극을 하는 길의 깊숙한 길까지야 갈 수 없겠지만, 훗날 돌아볼 때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지금도 열심히 대본을 외우고 노래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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