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린다. 처음 내릴 땐 올까? 말까? 퍽 망설이는 눈치더니 지금 아예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 주룩주룩 내리다 쏟아지다를 반복하고 있다. 사흘을 내리는 비에 지칠 때도 됐지만, 워낙 봄부터 여름 초입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기에 질리지는 않는다. 거실 밖으로 펼쳐지는 작은 구릉에 비구름이 사이로 자작나무가 젖고 미루나무가 젖고 있다.
거실 창 앞에 서서 유리창 밖 비를 바라본다. 고즈넉하다. 들리는 소리라곤 빗소리뿐. 이럴 땐 뜨거운 커피가 제격이다 싶다. 주방에서 커피 한잔을 들고 나와 거실 창 앞에 놓여있는 식탁에 앉는다. 그걸 기다렸다는 듯 빗방울 몇이 뛰어들어 창을 두드린다. 그 빗방울 속에 얼마 전 다녀온 홋카이도의 비에이 지역이 떠오른다. 그때도 비가 내렸다. 나지막한 구릉 사이를 버스는 달리고 이따금 하나둘 서 있는 나무들이 눈에 선하다.
커피 두어 모금 마시고 나니 텅 빈 집이 왠지 쓸쓸해진다. 컴퓨터를 켜고 유튜브에 들어가 ‘비 오는 거리’를 틀어 놓는다. 조용필의 나지막한 노랫소리가 가슴을 파고든다. ‘사랑했던 그 순간들 지금은 모두 갔지만 정다웠던 그 목소리 지금도 들려오네. 비 오는 거리에…’ 가슴을 파고들었던 노래가 빗속으로 들더니 낮은 구릉을 향해 달려나간다.
며칠 전부터 그가 생각났었다. 왜 문득 그가 생각났는지는 나도 알지 못한다. 그냥 이 생각 저 생각에 잠기다가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람을 하느님이 단 한 사람을, 단 하루만 보내준다면 누굴 택할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을 때 그가 생각났다. 세월이 흐르고 추억이 되면 아름다운 모습만 남는다더니 내가 딱 그 꼴이다. 뭐 그렇게 대단한 추억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도 그가 떠올랐던 것은 그의 따뜻한 마음씨 때문이었을 것이다.
영화를 보러 갔었다. 남대천 뚝방 밑에 있던 동명 극장이었다. 영화 제목 같은 거야 기억에서 사라진 지 오래지만, 그때 막 나오기 시작한 귤 한 봉지를 사 들고 영화관에 들어갔었다. 영화를 보면서 그가 얼음같이 찬 귤을 두 손에 감싸 안고 찬기를 녹여 내게 넘겨주던 달곰하고 따뜻했던 그 귤 맛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찬바람 몰아치는 눈 쌓인 거리를 걸었다. 눈의 고장답게 눈은 참 푸짐히도 내리고 있었다. 둘이 눈 속을 걸었다. 그의 코트 주머니에 내 손을 집어넣고 인적 드문 길을 두 손을 잡고 걸었다. 그러다 둘이 동시에 미끄러운 눈길에 나동그라졌다. 그때, 우리 얼굴 위에 쏟아지던 밤하늘의 눈, 눈, 눈.
비 내리는 여름날, 태풍이 몰려왔다고 언론마다 비 피해를 실시간으로 보도하고 있던 날. 태풍이 몰아치는 강원 여객 대기실에서 그가 오기를 발을 동동거리며 기다리고 있었다. 밤은 깊어졌는데 통금은 다가오는데 그가 온다는 버스는 오지 않았다. 기다리던 사람들도 하나둘 떠나갔던 어둡고 추운 텅 빈 대합실. 무서움에 실망감에 오들거리다 대기실을 나와 발길을 돌렸을 때, 빗속을 뚫고 들리던 날 부르던 그의 목소리. 나는 아직도 기억하는데 그는 왜 돌아오지 못할까. 떠나버린 시간, 떠나버린 사람, 나도 모르게 사라져 간 얼굴들은 지금 다 어디에 있을까.
사라져 간 사람들이 지금 어디쯤 사는지는 나는 모른다. 그러나 그가 홀연히 돌아와 내 곁에 머무는 오늘 같은 오후, 나는 그가 부르는 노래에 한없이 취해있다. 그는 어째서 빗속 어디엔가 숨어있는 무지개처럼 비 오는 날 내게 찾아와 무지갯빛 꿈속을 걷게 하는가. 왜 그는 꼭 이런 날만을 고집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