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11.19 04:00

인천 배다리 마을 "사람의 숨소리와 향기가 있는 이곳을 지켜가고 싶다"

다시 미래를 만난다… 舊도심 기행
1 대구 ‘진골목길’. 오래된 다방과 음식점이 늘어서 있다. 서울 인사동의 좁은 골목길 같다. / 이경민 영상미디어 기자 2 인천 화평동 냉면거리. 3 한때 40곳 넘었던 헌책방은 이제 6곳으로 줄었다. 1973년 문을 연 아벨서점. /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4 광주광역시 양림동 펭귄마을의 동네사랑인 ‘펭귄주막’. 1970년대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 권승준 기자
옛(舊) 도심은 오래된 미래다. 한때 번성했으나, 지금은 그 자취만을 간직하고 있는 이 공간은, 한때 격렬했으나 언젠가 사그라드는 사람의 삶을 닮았다. 그러나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된다. 옛 도심을 찾아 걷는 일은 한때 좋았던 옛 추억을 되새기는 것뿐 아니라, 앞만 보고 달리느라 잊었던 고향의 푸근함을 다시 살리는 일이다. 옛 시절의 자취를 찾아, 즐거운 추억을 만나러 인천·대구·광주광역시로 발길을 옮겼다. 과거가 미래가 되는 기적이 그곳에 있었다.

1948년 스물세 살 박경리(1926~2008)는 인천 동구 금곡동으로 이사해 헌책방을 열었다. 진주고녀를 졸업하고 3년이 지난 때였다. 책방에 앉아 밤새워 읽은 책들은 훗날 대하소설 '토지'를 쓰는 이 작가의 문학적 자양분이 되었다. 같은 해 조봉암(1899~1959)은 이곳에 선거사무실을 열었다. 제헌의원을 뽑는 5·10선거에서 당선한 그는 이승만 내각 초대 농림부장관으로 농지개혁을 이끌었다.

이곳은 개항 이후 '배다리'로 불리던 곳. 서해 바다에서 이곳까지 배가 들어와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서울로 가는 길목이었던 까닭에 인천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한때 서점만 40여 곳에 달했다. 서울 동대문, 부산 보수동과 함께 전국 3대 책방거리로 불렸다. 지금은 옛 모습을 찾을 수 없다. 서점은 여섯 곳으로 줄었다. 이곳에서 60년간 헌책방을 하고 있는 집현전 서점 오태운(85)씨는 "스물다섯 살 때 책방을 열어 아들·딸 둘을 모두 대학까지 보냈다"고 했다. 그는 "이젠 책 사러 오는 사람보다 팔러 오는 사람이 더 많다"며 쓸쓸하게 웃었다.

아벨서점 대표 곽현숙(65)씨는 1973년부터 42년째 헌책방을 운영 중이다. 한때 책방을 닫으려고 한 적도 있었다. 10여 년 전 고층 빌딩을 올린다는 재개발 계획이 잡혔을 때 "이제 그만 쉬라는 하늘의 뜻인가 보다"고 생각했다. 곧 마음을 바꿨다. "정말 문을 닫느냐?"며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전국에서 거의 매일 찾아왔다. 

인천 배다리 마을
인천 배다리 마을엔 숨은그림처럼 벽화가 그려져 있다. 학교 가는 여학생들의 모습이 정겹다. /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곽씨는 "이분들을 보며 우리가 살아온 역사, 사람의 숨소리와 향기가 있는 이곳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매달 마지막 주 토요일 여는 '배다리 시 낭송회'를 2003년부터 90회째 이어오고 있다. 최근엔 잡지 소장가 서상진씨를 초대해 '근대 잡지 전시회'를 열었다. 곽씨는 "책방지기로서 책을 좋아하는 분들과 함께 이곳을 지켜가고 싶다"고 했다.

배다리 주민들은 쇠락해가는 옛 도심 마을을 지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언덕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 담장에는 개성 넘치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지역 미술단체 '퍼포먼스 반지하'가 5~6년 전부터 그린 그림들이다. 학교 가는 여학생들, 의자에 앉아 쉬는 할머니, 소나무와 초가집 같은 정겨운 그림이 마을 30여 곳 이곳저곳에 숨어 있다. 지난해에는 '배다리 안내소'를 열었다. 안내소를 지키는 여성 주인은 "이름을 쓰지 않는다. 청산별곡이라고 불러달라"고 했다. '청산별곡'은 1950년대 배다리 마을 최대 상점이었던 조흥상회 건물 2층에 '생활사 박물관'도 열었다. 사기 밥그릇, 낡은 벽시계 같은 옛 물건들이 놓여 있다. 지금은 전시물 정리를 위해 잠시 문을 닫았다. 2~3주 내로 다시 열 예정이라고 한다. 안내소에서는 마을 정보를 담은 자료를 500원에 판다.

인천 배다리 마을
(윗쪽 사진) 미술 전시 공간 ‘스페이스 빔’. (아랫쪽 사진) 생활사 박물관. 재개관 예정이다.
인천은 근대 문물이 가장 먼저 들어온 곳. 배다리 마을에 있는 영화초교는 미국인 선교사 존스가 1892년 연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학교다. 본관 건물은 1911년 세운 근대 건축물이다. 이웃한 창영초교는 1907년 개교한 인천 최초의 공립보통학교다. 교사(校舍)는 1922년 세운 건물. '3·1운동 인천지역 발상지'라고 새긴 입석이 서 있다. 19세기 말 미국 감리교가 파견한 여성 선교사들이 묵었던 기숙사 건물은 유럽 어느 곳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들게 한다.

무심히 지나치면 배다리 마을은 그저 낡고 허름한 변두리 지역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구석구석 천천히 돌아보면 마을이 말하는 작은 목소리가 들린다. 새것으로 바꾸는 것만이 정답은 아니라는.

가는 길

국철 1호선 동인천역 4번 출구 또는 도원역 3번 출구로 나와 배다리 마을 방면. 도원역에서 내리면 '옛 꿀꿀이죽 골목'을 지난다. 6·25전쟁 이후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잔반으로 끓인 죽을 팔던 곳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나무를 심고 미술 작품을 전시해 걸으면서 감상하기 좋은 길로 탈바꿈했다. 배다리 마을 답사는 안내소지기 '청산별곡'(010-9007-3427)에 문의. 마을 주민들은 그를 '청산님'이라고 부른다.

먹을거리

배다리 마을에서 동인천역을 지나 '화평동 세숫대야 냉면거리'에서 늦은 점심을 해도 좋다. 저마다 원조라고 내세우는 냉면집이 줄지어 있다. 투박하지만 양 많은 검은색 면발의 냉면 타래를 커다란 그릇에 낸다. 5000원.

조선일보 조선닷컴

시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