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11.24 09:49

초콜릿으로 만든 빨간색의 중국풍 정자와 앙증맞은 다리가 금테를 두른 접시 위에서 작은 정원을 이루고 있었다. 얼마 전 미국을 방문한 시진핑 중국 주석을 위해 백악관이 국빈만찬에서 내놓은 디저트 중 하나였다. 만찬 하루 전날 사진으로 공개된 특별메뉴들 가운데 유독 다리가 눈에 띄었다. 떨어진 두 곳을 잇는 다리처럼 두 나라 사이의 활발한 교류를 기대한다는 의미를 담았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야말로 다리가 점점 더 절실해지고 있다. 국가와 사회, 직장, 단체, 가정의 일원으로 엮인 네트워크는 첨단 통신망 덕에 날로 촘촘해지는 듯한데 외딴 섬 같다고 느끼는 이들은 늘어만 가고 있으니 말이다. 나 홀로 청춘들, 우울한 중년들, 외로운 노년들이 많다. 속도 경쟁에다 세대 간의 단절로 인해 서로를 낯설어하면서 의미 있는 관계 형성이 어려워지고 있어서다. 누군가의 필요를 도울 사람이 있는가 하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도 있건만 이어줄 다리가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지역 아동센터 아동이 쿠키맨을 만들며 연습한 내 마음 전달하기.
▲지역 아동센터 아동이 쿠키맨을 만들며 연습한 내 마음 전달하기.

최근 개정 증보판이 출간된 ‘가치 있게 나이 드는 법’의 저자 전혜성 박사의 다리 자랑이 떠오른다. 전 박사는 자녀 6명을 모두 하버드와 예일대에 보내고, 그중 둘은 미 행정부 고위직에 오르는 등 자녀교육의 대명사이자 본인 또한 세계적 석학인 분이다. 여든 중반의 그녀는 저서에서 자신의 미국 생활터전인 비영리 노인복지시설 휘트니센터의 ‘브리지(Bridge)’를 자랑하고 있다. 단어 그대로 세대 간에 다리를 놓아 센터의 노인들과 인근 고등학생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대화를 나누는 프로그램이란다.


인생나눔교실

뜻밖에 노인들보다 아이들에게 반응이 더 좋다며 전 박사는 이렇게 쓰고 있다. “부모들처럼 다그치지 않고 끝까지 이야기를 들어 주는 이웃 노인들과의 즐거운 만남을 통해 진학과 미래, 교우 관계와 이성 교제, 심지어 부모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고민까지도 상담하곤 한다. 고등학생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듣다 보면 때론 하찮은 생각처럼 느껴질 때도 있고 배부른 투정으로 보일 때도 있지만, 많은 나이를 무기 삼아 설교나 잔소리를 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대를 훌쩍 뛰어넘는 나이 차로 부모 세대들과의 간극을 좁히는 가교 역할을 하기도 한다. 부모나 선생님도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들의 고민과 걱정을 자애로운 마음으로 받아들여 주고 진심 어린 충고를 전하는 휘트니센터 입주민들과의 브리지 프로그램을 통해 어린 고등학생들은 이미 오래전에 미국 사회에서 자취를 감춘 대가족 제도의 이점을 누리게 된다.” 노인들 또한 모처럼 ‘손자’ ‘손녀’를 만나니 외로움은 물러가고 에너지가 몰려오지 않을까. 

이렇게 서로 응답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게 중요한 것 같다. 다리가 놓이면 만남과 소통이 촉진되고, 누군가와 ‘함께’ 살아간다는 경험이 가능하게 된다. 뜻밖에 지난 9월부터 나도 그런 경험을 하고 있다. 바로 ‘인생나눔교실’을 통해서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설계하고, 전국의 5개 문화재단이 놓은 인생을 나누는 다리에서 나는 경기문화재단에 속한 멘토 중 한 사람으로 지역 아동센터와 자유학기 및 보호관찰 청소년, 그리고 군인들과 만나고 있다.  


가치 있는 삶

원래 멘토는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에 나오는 주인공 오디세우스의 친구 이름에서 유래된 단어다. 오디세우스는 트로이전쟁에 출정하면서 벗이자 충실한 조언자인 멘토에게 아들 텔레마코스의 교육을 부탁한다. 멘토는 무려 10여 년 동안 스승으로서, 친구, 상담자 때로는 아버지로서 그를 잘 돌봐준다. 이후 멘토는 지혜와 신뢰로 한 사람의 인생을 이끌어 주는 지도자와 동의어가 됐다. 세대 간 소통에 중점을 두는 인생나눔교실에서 멘토는 지도자라기보다 서로의 삶을 말하고 듣는 상호작용으로 지혜를 공유한다.

이를 위해 다양하게 만들어진 멘토링 프로그램을 내 나름대로 응용해서 주제가 있고 가슴에 울림을 주는 소통이 이뤄지게 힘을 쏟는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가치 돌아보기, 나의 실물자산과 가치자산을 돌아보고 이를 키워나가는 근력 기르기, 가까이 있는 행복 찾기, 마음 전달하는 연습, 다른 이들의 고민을 공유하고 함께 해결책을 찾는 격려의 힘 배우기 등이 그간 함께 나눈 주제들이다. 무엇보다도 앞서 전혜성 박사의 말마따나 ‘많은 나이를 무기 삼아 설교나 잔소리를 하지 않는’ 시간이 되도록 조심하고 있다.

“모든 성별과 세대와 소통할 수 있어야 하고, 나이 든 세대도 젊은 세대와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팔순 할머니도 여덟 살 소녀와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려면 그 누군가의 존재부터 인정하고 그로부터 배울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럴 때 누군가에게 무엇이 되는 가치 있는 삶이 가능하다.” 전 박사가 말하는 가치 있는 삶이 이제 본격 퇴직을 맞아 인생이모작에 나서는 수많은 50대 베이비부머들에게도 가능해지면 좋겠다.

그러려면 사회 곳곳에 다리가 필요하다. 크고 멋진 다리가 아니면 어떤가. 돌 몇 개만 가져다 놓아도 정겨운 징검다리가 될 수 있다. 우선은 나부터 다리가 되려는 마음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불후의 명곡 ‘브리지 오버 트러블드 워터(Bridge Over Troubled Water)’에서 사이먼 앤 가펑클은 노래한다. “그대 지치고 초라하게 느껴질 때 눈에 눈물 고이면 닦아 줄게요. 제가 당신 곁에 있잖아요. 세상이 힘들고 친구도 없을 때 제가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 드릴게요…” 이번 송년회에서는 이 노래를 부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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