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친 전시공간이 좋다… 우리 머릿속 같으니까"

"아파르트헤이트(인종 분리 정책)가 가져온 사회 부조리는 너무나 커서 작업 안에 넣지 않을 수 없었어요. 요하네스버그에서 산 20년을 일기 쓰듯 작품에 넣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작가 윌리엄 켄트리지(60)는 "작업실까지 비집고 들어온 거대한 공포를 모른 척 눈감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는 아파르트헤이트를 비롯해 중국 문화대혁명 등 묵직한 정치적 주제를 '목탄 드로잉 애니메이션'이라는 독창적 기법으로 다뤄 국제적 주목을 받는 작가다.

그의 개인전 '윌리엄 켄트리지―주변적 고찰'전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1일 개막한다. 개관한 지 2년 넘도록 '국립'에 걸맞은 전시다운 전시가 없었다는 평가를 받는 서울관에서 모처럼 열리는 기대작이다. 목탄으로 그린 드로잉을 비롯해 영상·설치 등 108점이 제2·3·4실과 복도까지 채웠다. 서울관 개관 이후 최대 규모다.

"작가의 작업실은 세상을 끌어들여 배열하고 재해석해서 다시 세상 밖으로 던지는 공간이에요. 사람 머릿속 같지요. 머릿속에선 아이디어, 꿈, 기억이 교차하다가 말, 단어, 행동으로 바깥세상에 표출되니까요. 이번 전시는 제 작업실의 확장이자 사람의 사고 과정을 연장한 것입니다." 작가의 말처럼 전시장은 복잡한 이미지가 가득한 머릿속을 꺼내 놓은 듯 음악과 영상 드로잉이 교차하며 분주하게 돌아간다.

"거칠고(roughness), 지저분한(messiness) 전시 공간을 좋아한다"는 작가의 취향은 '카셀 도쿠멘타 13'에서 선보였던 대표작 '시간의 거부'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사다리, 먼지 뽀얀 나무 상자가 널브러져 공사판 느낌으로 연출된 전시장 벽면으로 심장 박동처럼 쿵쾅 울리는 필립 밀러의 음악에 맞춰 무용수들의 춤이 실루엣으로 흘러나온다. 산업화 이후 인간을 구속해온 표준화된 시간을 주제로 삼은 영상작이다. 나미비아의 잔혹한 대학살 사건을 다룬 '검은 상자'는 입체로 제작된 소규모 극장에서 인형극처럼 펼쳐진다. 폭압을 다룬 작품이지만 목탄이 주는 따뜻함과 아늑한 전시장 디자인 덕에 서정적인 운율로 다가온다. 세계 미술 지형에서 작가가 지닌 지명도, 전시 구성, 규모 등 삼박자를 고루 갖춰 그간 이 미술관을 향한 대중의 실망을 희석시켜 줄 만한 전시다. 내년 3월 27일까지. 문의 (02)3701-9500.